[강론] 예수님의 심판, 심판받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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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예수님의 심판, 심판받는 교회

 

이사 43,16-21; 필리 3,8-14; 요한 8,1-11

사순 제5주일; 2019.4.7.; 이기우 신부

 

1. 사순 제5주일인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따라서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그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다가 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율법적 심판을 요구하던 그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심판을 행하셨고, 그렇게 해서 용서받은 그 여인은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듣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감히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앞세워 단죄를 일삼는 바리사이들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들으려면 우리 자신을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그 여인의 자리에 세워놓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라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의 심판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2.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분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을 지닌 분이시고 그 막강했던 파라오의 군대를 간단히 물리쳐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주신 분이시지만, 이 업적은 결국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해방된 이들로 하여금 새 출발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예전의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죄를 저질러 악마의 수하에 짓눌렸던 예전의 일이나 옛날의 일들을 잊어주겠다는 다짐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되고 해방된 이들로 하여금 새 일을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박해자였던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4. 요한 복음 14,9에 보면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는 제자 필립보의 청에 예수님께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고 대답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곧 심판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다는 뜻이 됩니다. 또, 루카 복음 22,30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이 율법적으로 단죄하는 심판이 아니라 사랑으로 죄와 완전히 끊어버리게 하는 심판이었는데, 이 사랑의 심판자 역할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이루어진 당신 교회에 부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5.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계승하여 세상을 심판하되,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 복음적 매력이 흘러 넘쳐야 하고, 그 매력에 이끌린 세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고자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선교라 합니다. 선교의 본질은, 복음적 매력, 자발적 믿음, 그리고 믿음에 따른 실천입니다. 그래서 선교를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사랑의 심판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6. 그런데 최근 우리 교회를 둘러싼 상황을 관찰해 보면 사태가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교회에 복음적 매력이 흘러넘쳐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실망과 불신이 쌓여가고, 자발적으로 믿겠다고 세례 받은 이들이 냉담하는 비율이 무려 80%를 넘어서고, 아직 믿고 있지는 않지만 가톨릭 교회에 기대를 걸던 이들이 오히려 걱정과 심지어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심판하라는 사명을 받은 교회가 거꾸로 세상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냉담자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냉담하는 당사자의 사정도 있을 것이고 자기 책임도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 비율이 80%를 넘는다는 사실은 개인적 탓보다도 훨씬 더 큰 원인이 그 뒤에 숨어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냉담자의 대량 발생 현상은 그 자체가 교회의 현실, 교회의 복음적 매력 정도에 대한 심판적 반응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입니다. 

냉담을 풀고 다시 돌아온 신자들에게서 냉담했던 이유로서 제일 많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고해성사를 보기가 부담스러워서’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핑계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고해성사가 부담이라 해도 그 부담을 지고서라도 다시 돌아오려는 동기가 박약하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와야 할 정도로 신앙의 매력이 약하다는 말도 되는 것이지요. 복음적 매력을 상실한 교회는 냉담자를 양산할 뿐 선교의 경쟁력도 상실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부르심 받은 교회가 빛을 비추지 못하고 그 빛의 세기가 희미해진다면 어두운 세상에서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적 매력을 되찾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고 이야말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무릇 실력은 이해와 실천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지난 이천 년 동안 알아듣고 실천하는 진화의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지닌 이해와 실천에 커다란 도움을 받았고 또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인 까닭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물이나 사태, 인간과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많은 진보가 있었습니다. 사물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적 상식이, 사태에 대해서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인간에 대해서는 인문학적 교양이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는 종교학이나 신학적 인식이 그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도 알아들은 만큼 실천해 왔습니다. 

 

8. 그런데 세상은 천동설에 입각한 세계관에서 지동설에 입각한 세계관으로 안목이 바뀌고 있는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천동설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입지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세계 교회가 다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아직도 공의회 이전처럼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에 대한 단적인 증거가 전통 교리를 기준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입니다. 전통 교리가 가르치는 십계명의 기준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공의회가 새롭게 알아들은 예수님의 계시 진리는 지동설적 세계관입니다. 

 

9. 이를 반영하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인데, 이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가운데 특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흠숭했느냐 하는 잣대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보살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계명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라는 것이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은 자본 숭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특히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고 사도들이 계승한 자발적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가치인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기 위하여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데 선의의 모든 이들과 연대하고, 특별히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와 책임을 앞세워 보조성을 귀하게 여기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10.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종종 간음한 여인에 빗대고 있는 것은 상호충실해야 할 계약을 어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간음의 죄를 지은 여인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되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심판에 대한 복음을 먼저 우리 자신과 교회에 적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했던, 특히 부활 신앙에 미흡하고 복음적 매력을 발산하지 못했던 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까이 다가온 부활 축제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 안에서 거듭 태어나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고 그렇게 하여 우리 교회도 세상 사람들 안에서 거듭 태어나는 부활의 삶을 증거함으로써 죄로 이지러진 세상에서 죄로 고통받고 지친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된 삶을 보고 희망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의 허물에 얽매여 망설이지 말라는 이사야의 예언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는 바오로의 사도적 권고에 바탕하여,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용서받은 그 여인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너그러운 자비를 체험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의 심판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사도 바오로처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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