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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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

 

여호 5,9ㄱㄴ.10-12; 2코린 5,17-21; 루카 15,1-3.11ㄴ-32

사순 제4주일; 2019.3.31.; 이기우 신부

1. 사순 시기 주일 복음의 흐름 : 벌써 사순 제4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던 예수님의 삶의 양식에 대한 회개를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일 복음의 흐름을 뒤돌아보자면, 제1주일 복음에서 사탄의 유혹에 맞서 이겨내고, 제2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를 목표로 우리의 거룩한 변화를 다짐하며, 제3주일에서 죄악으로 이지러진 세상에 드러난 시대의 징표가 악인들을 회개시켜야 하는 우리의 회개를 생각한 데 이어서, 정작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이들이 겨냥해야 할 삶의 양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2. ‘탕자의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유명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든 데 대해 투덜거리며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비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었던 가난한 이들을 비롯해서 공적 기피인물들이었던 세리 같은 죄인들까지 찾아가서 어울리시며 생활하시던 양식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유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경건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비난받으셔야 했던 생활양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예수의 생활 양식의 특징, ⓵ 현장성 :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주로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셔서 활동하셨습니다. 특히 질병이나 장애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빈곤으로 인해 먹고 살기 바빠서 율법을 잘 알지도 못했고 엄격히 지킬 수도 없어서 죄인으로 취급 받던 사람들을 주로 찾아가셨고, 그러다가 세리 같은 이들도 회개하기를 원하면 기꺼이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이 살아가던 생활양식과 예수님의 생활양식의 차이는 그들이 회당 중심으로 종교적인 특징을 보인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중심으로 현장적인 특징을 보여주셨습니다. 

 

4. 예수의 생활 양식의 특징, ⓶ 공동체성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찾아가 만나신 이들이 질병이나 장애, 또는 빈곤 등의 이유로 주류 집단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그들과 어울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음식도 나누시고 잔치도 벌이셨습니다. 오죽하면 바리사이들로부터 ‘먹보요 술꾼’이라는 험담까지 들으셨겠습니까? 그러한 행동양식은 소외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소외되거나 낙인찍힌 채 살아가지 않도록 그들끼리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그들이 공동체적인 삶으로써 체험할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산상설교와 진복팔단의 말씀들은 이들에게 선포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았거나 구마를 받은 이들 역시 그러한 이유로 가족이나 살던 마을로 돌려보내졌던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나 작은 천국이라고 느낄 만한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공동체는 바리사이들이 회당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 집단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느님을 엄격하게 느끼기보다는 자신들을 아주 사랑하는 아버지로 체험할 수 있었고, 율법을 잣대로 단죄하는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중심으로 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5. 예수의 생활 양식의 특징, ⓷ 가치지향성 :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떠받들던 율법대로 살지 않고 힘 없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수탈하여 부유하게 살아갔던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던 이들도 믿는 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복음으로 형성된 현장 공동체의 삶은 기쁘게 살기 위한 믿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입으로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이고, 비록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가난한 이들이지만 복음을 믿고 회개한 이들은 부패한 유다교를 대신해서 깨끗한 삶으로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6. 경건했던 큰 아들과 방탕했으나 돌아온 작은 아들 :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비유에는 두 아들이 나옵니다. 경건하며 성실했던 큰 아들은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데도 효도를 하기는커녕 미리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떼를 쓰고 그 유산을 받아서는 엉뚱한 방식으로 탕진하며 죄를 지었던 작은 아들은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가난한 이들을 상징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비록 바리사이들의 잣대로는 형편없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회개한 것처럼, 작은 아들은 방탕한 생활 끝에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목이 빠져라 하고 집 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모습은, 가난한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을 기뻐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도 동생의 귀환을 반기기는커녕 아버지가 동생을 나무라지도 않고 맞아들이는 데 대해 질투하는 큰 아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돌아오는 가난한 이들을 질투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7. 현장 사목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던 복음선포 활동에 일찌감치 눈을 떴던 교회가 라틴 아메리카 교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고 자기 나라에 돌아간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은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과 1979년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2차와 3차 총회를 열고 가난한 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인적 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이들을 위한 현장 사목에 배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를 본받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대명사는 고아와 기아, 독거노인, 노숙자들이며 좀 더 넓은 범주에서는 도시 빈민과 노동자가 포함됩니다.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목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활동가들이 우리 교회로부터 존중받고 배려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는 법률 때문에 오히려 18세 이후에 버림받는 고아 청소년들을 위한 사도직도 개발할 필요도 있습니다. 

 

8. 시혜가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해 주어야 한다! :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는 필요한 복지 혜택을 베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답게 존엄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들끼리의 관계는 물론이요 일반 사람들과도 정상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교회도 이들과 공동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상호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필수적입니다. 그러자면 대규모 복지시설보다는 소규모 그룹으로 형성된 가정 형태의 공동체를 기본으로 사회복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9. 가치지향성을 담은 본당 사목을! : 우리 교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투입되고 있는 분야가 본당 사목입니다. 대략 1/10 정도의 신자들이 단체에 가입하여 본당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고, 나머지 신자들은 주로 주일과 평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례 위주의 종교단체 성격을 벗어나기 어려워서 신자들도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흐르게 되어 신앙적 가치를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에서 증거하는 데에는 소홀하게 되어 버립니다. 

많은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사목활동이 이루어지다보니 사목의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가정 성화 등의 기본적인 목표 이외에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기도 어렵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려는 강론을 시도하기도 신자들의 눈치가 보여서 어렵습니다. 기본유지비가 많이 들다보니,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은 매우 특별한 관심사로 취급되어 버리고, 그때마다 특별한 헌금을 따로 걷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부수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교무금과 헌금으로 마련된 재원은 교구와 본당 유지비로 충당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활동에서 두드러졌던 가치지향이 본당 사목에서는 뒷 순위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왜 믿는지, 믿음을 증거하기 위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하는 가치지향을 선명하게 내세우는 일이 더욱 중요해지는 까닭입니다. 공동체성을 잊어버려가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현상을 극복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자칫 믿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중산층 이데올로기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는 일과 함께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공유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10. 질투하는 큰 아들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본받아야 : 우리 교회가 경건하고 풍족하게 살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질투하는 큰 아들이 되기보다는, 그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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