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둘레를 파서 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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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둘레를 파서 거름을

 

탈출 3,1-8ㄱㄷ.13-15; 1코린 10,1-6.10-12; 루카 13,1-9

사순 제3주일; 2019.3.24.; 이기우 신부

 

1. 유혹과 변화와 자비 :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제1주일에는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방패로 이겨내시는 복음을 들었고, 제2주일에는 제자들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실 당신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루도록 격려하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죄악에로 이끄는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거룩한 변화를 통해 인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자비의 복음을 듣습니다. 

 

2. 불 타지 않는 떨기 : 오늘의 제1독서는 모세가 드디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파라오의 칼을 피해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라난 모세는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도자 훈련을 받으며 이집트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바람에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서 양치는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호렙 산에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를 보고 신기해서 다가가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는데, 이때 나이가 여든이었습니다. 늘그막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까지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왕자로서 사십 년을 훈련시키셨고, 양치기로서 역시 사십 년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왕자로 보낸 사십 년이 사람들을 이끌 줄 아는 지도자로 양성하는 기간이었다면, 양치기로 보낸 사십 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목자로 양성하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목격한 광경은 불 타지 않는 떨기였는데, 이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그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는 종살이하고 있는 동족을 구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파라오의 신임을 얻어서 이집트의 재상으로 봉직한 요셉의 후손들이 처음에는 공신의 가족으로 대우를 받고 이집트 생활을 시작했지만, 장정만도 육십 만이 넘는 커다란 인구로 늘어난 수백 년 후에는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이집트 사람들의 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파라오에 의해서 노예들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독한 노예노동을 하면서도 요셉의 후손들인 히브리들은 요셉으로부터 물려받은 하느님 신앙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혹한 생활여건에 처하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런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히브리 사람들은 언젠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잊지 않고 구해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종살이를 하면서도 하느님을 믿고 있는 히브리인들이야말로 역사상으로는 불 타지 않는 떨기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의 본문에서 ‘불 타지 않는 떨기’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이중의 특별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하는 고통과 겪어야 하는 시련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섭리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역시 작용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 그 상징이 불 타지 않는 떨기인 것입니다. 

 

3. 반면교사의 본보기 : 오늘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그 당시로부터 천이백 여년 전에 일어났던 이집트 탈출 사건을 회상시키면서 ‘불 타지 않는 떨기’에 담긴 하느님의 섭리적 개입을 예수님으로 소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고 또 실제로도 가나안에 히브리 사람들을 들여보내심으로써 확증시켜주신 약속의 땅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적 현실임을 사도 바오로는 매우 상징적이며 은유적인 표현으로 코린토 신자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된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와 광야에서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해방된 역사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미리 일깨워주는 예표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마른 발로 건너 시나이 광야로 들어감으로써 이집트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사건은 코린토 신자들이 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건을 뜻했던 것이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바위 샘에서 마셨던 물이 예표로서 뜻하는 것은 세례 받은 코린토 신자들이 성체성사에서 받아 먹는 성체와 받아 마시는 성혈이라는 영적 양식이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반면교사의 본보기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박해자 신세로부터 선교사 직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바오로가 자신만이 아니라 코린토 신자들 모두를, 아니 더 나아가서는 코린토 편지를 읽게 될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현실로 들어가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새로운 불 타지 않는 떨기가 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멸망하리라 : 열성적인 바리사이 출신으로서 그 어느 유다인보다도 율법에 충실했던 바오로가 율법과 바리사이 전통을 말끔하게 버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로서 삶을 바꾸고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를 바꾼 까닭은 유다교와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 죄악이 만연하게 된 배경에는 로마 제국과 빌라도 총독 그리고 헤로데 영주와 사두가이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저질렀던 수직 폭력이 근본 원인이 있고 이에 영향을 받아 백성 사이에서 서로간에 저질렀던 수평 폭력이 부수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즉, 헤로데 영주는 자신을 비판하던 세례자 요한을 빌라도 총독의 재가도 받지 않고 참수해 버렸고, 이에 화가 난 빌라도는 엉뚱하게도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서 화풀이를 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추모하는 제사를 드리려던 것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당연히 빌라도 총독의 재가를 받지 않고 드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나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나 권력을 휘둘러 무고한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악인들이었던 판에 성전을 맡아 관리하던 사두가이들도 사악하기는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있던 실로암 탑은 사두가이들의 관리 책임 하에 있었는데, 제사를 바치는 백성으로부터 받는 수입에 눈이 멀었던 그들은 성전의 시설과 설비들을 안전하게 보수하고 관리하는 데에는 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부실한 관리 상태에 놓여 있었던 실로암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무려 열여덟 사람이나 깔려 죽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성을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무책임하게 권력만 휘두르는 탓에 백성들 역시 비상한 방법으로 출현하신 예수님의 기적 사건들을 목격하거나 그 복음을 들으면서도 회개하기를 마냥 미루고 있었던 판국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위나 아래나 죄악에 물들어있기는 매한가지였던 셈이고,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답답한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위나 아래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5. 둘레를 파고 거름을 :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철저한 회개의 바탕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열매를 맺지 못해서 잘릴 운명에 처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드시면서 둘레를 파서 거름을 줌으로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려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포도밭에는 포도나무를 심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철마다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애시당초 맞지도 않는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이는 모세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되고 가나안으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근본적으로 자격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불에 타지 않는 떨기로 보여서 선택을 받기는 했으나, 겪어 보니 불에 타버리는 떨기에 지나지 않았던 셈입니다. 

 

이러한 암시는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히브리 사람들이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아 해방되고 나서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광야에서도 불평불만을 일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고, 왕국을 세운 다음에도 우상숭배에 물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데도 눈 앞의 이익과 영광에만 정신이 팔렸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촉구하신 철저한 회개는 하느님의 자비로 선택된 하느님 백성이라면 그 자비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자유에 걸맞는 책임을 이행하려는 마음가짐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입니다. 

 

6.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었던 수직 폭력과 수평 폭력의 죄악스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본질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답답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겁니다. 그 본질은 책임에 걸맞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네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요청되는 회개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답답한 신앙으로도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본보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야말로 불에 타지 않는 떨기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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