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저항과 싸움, 유혹 기사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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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저항과 싸움, 유혹 기사의 본질

 

신명 26,4-10; 로마 10,8-13; 루카 4,1-13

사순 제1주일; 2019.3.10.;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으신 유혹 이야기를 전합니다. 유혹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마귀가 존재하고 활약하는 한, 그리고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자유가 주어져있는 한 유혹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유가 표상하는 바에 따라서 우리는 악령으로부터 유혹을 받아 악에 빠질 수도 있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선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로 구성된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유혹에 대한 저항과 싸움의 과정을 통해서 선포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사탄과의 싸움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싸움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활 내내 이루어져야 할 과업이었기에 세례 때에 내려오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사탄이 기다리고 있는 유다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탄과 맞서 이겨내신 이러한 예수님의 유혹 기사를 교회는 사순 제1주일의 복음으로 선포하면서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어 받아야 할 저항과 싸움의 교과서로 받아들입니다. 

 

2.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세 가지로 찾아 왔습니다. 빵과 권세와 하느님 시험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은 사십 일 동안 굶어서 몹시 시장하셨던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라도 굶주림을 면하라고 유혹해 왔습니다. 빵은 먹는 음식이고 이는 경제 문제와 연결됩니다. 물질만능주의, 대량소비주의, 빈부의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 현실 등이 이 빵의 유혹과 관련해서 교회가 식별할 수 있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또한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사탄에게 경배를 하면 그 나라들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노라고 유혹해 왔습니다. 권세의 유혹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운명보다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세상 안에서 소수의 집단으로서 외면받는 것이 아니라 다수 집단이 되도록 교세 성장을 이루고 싶은 교회성장주의,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외면당하기보다는 존경을 받고 명성을 얻어서 사회 안에 영향력을 키우고 싶은 교회의 명예심과 자존심과 관련됩니다. 

끝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밑으로 몸을 던져 보라고 유혹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 주지 않겠느냐고 성경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유혹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만 따를 수 있는 은총을 함부로 시험해 보려는 유혹 역시 세속의 권력에 굴종할 경우에도 교회의 안녕이 보전되리라는 위험한 모험으로 다가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극도로 허기지신 처지에서도 그 빵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쉽사리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결과가 십자가 없이 손쉽게 이룩되기보다는 차라리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어 부활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세에 굴종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이 뒤따를 것이라는 유혹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거절하시고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함을 선언하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에 유다 광야에서 받으셨던 유혹은 공생활 중에도 찾아왔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광야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듣느라 몹시 허기졌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려고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군중은 그 빵을 매일 달라고 졸라댔고 예수님을 임금으로라도 모시려고 닥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요구와 기대를 뿌리치시고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며 당신을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하시며 빵이 되신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려는 성체성사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군중 가운데에는 그분의 언변과 기적까지 일으키시는 능력을 탐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고자 호시탐탐 노리던 혁명당원들이 있었고, 이스카리옷 유다도 그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이라는 최고의회가 부여받고 있는 제한된 권력이나마 이용해서 과월절 축제에 모인 군중을 선동한다면 로마 총독의 군사력도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계산으로 예수님을 의회에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하시고는 침묵으로 그로 인한 고난과 죽음을 견디셨습니다. 세상 권력과 타협해서 세워질 하느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파 및 바리사이파와 예수님과의 사이는 공생활 내내 하느님의 권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날카로운 경쟁이 불붙듯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의 거짓 종교적 권위에 예수님께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셨고, 차라리 그들이 건네주는 십자가 고난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을 때마저도 기적의 능력으로 내려와 보라는 비아냥을 들으셨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에 당신을 내맡기셨습니다. 

 

5. 교회의 역사에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을 받은 교회가 예수님처럼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굴종하고 말았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교황청과 유럽 가톨릭 교회가 현세의 권력을 탐하고 베드로 대성전을 화려하게 지어보겠다는 유혹에 빠져 무리하게 모금을 하다가 개혁파들이 그에 대해 항의하자  이들을 파문함으로써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떨어져나가게 만들었고, 산업혁명 당시에 대다수 노동자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의 편을 들다가 공산주의 운동을 자초하고 말았던 역사가 있습니다. 빵과 권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교회의 건물과 교세가 커지면 당연히 하느님의 천사들이 보호해 주시리라고 여겼던 교만의 역사입니다. 

 

신분차별이 엄혹하던 시절에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여왔고 그 복음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이 가득찼던, 그리고 조선의 조정으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무려 백 년 동안이나 받으면서 치명을 할지언정 권력에 굴종하기를 거부했던 자랑스런 역사를 간직한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도, 사탄의 유혹과도 같은 권력의 마수(魔手)에 굴종하고 말았던 수치스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기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에 그러했습니다. 

해방 직후 독립을 바라던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해방 직후 중앙청 꼭대기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성조기가 올라갔습니다. 미군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이었던 조선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포고령을 내리고 점령군으로 진주했습니다. 그 미군을 환영하는 미사를 한국 천주교회는 명동 성당에서 대대적으로 거행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패와 독재를 일삼던 리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선 지 불과 9개월 만에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헌법을 유린하는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에도,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이 쿠데타를 즉시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군사 혁명 정부의 재건 사업에 협력하라는 교서까지 발표했습니다. 이 역시 민주주의를 소망해온 대다수 국민의 여망을 외면하는 처사였습니다. 

 

교회 역사의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가 말해주는 교훈은, 역사의 전환기에 영적인 식별을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식    별을 신자들과 더불어 해야 한다는 것과 민중의 현실 속에서 이끄시는 성령의 표지를 감안하여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노선을 따라 살아온 북녘 동포들과의 화해와 민족 통합을 앞두고 있는 이 시대의 요청 역시, 반공의 보루를 자처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온 지난 날의 시대적 한계를 과감하게 뛰어넘어야 한다는 데로 모아집니다. 결국, 복음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복음적 선택이 무엇일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6. 오늘 복음이 악에 대한 저항과 싸움을 말하고 있다면, 오늘 제1독서에서는 정작 저항과 싸움을 통해 지향해야 할 공동선에 대해 말해줍니다. 즉, 신명기 26장의 독서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떠돌이 유랑민이었다가 먹고 살 길을 찾아 이집트로 들어갔다가 종살이를 하던 노예들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권능을 온 인류에게 알리시려고 이렇게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의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고 이 이스라엘이 만방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토지가 없었던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도와주시고 그 땅에서 소출을 거두면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느님의 몫으로 바치게 하셨습니다. 이 봉헌 제물은 그들 안에서도 경작할 땅이 없어 소출을 거둘 수도 없었던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몫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방식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경험한 역사적 해방이 모든 민족에게 이루어지도록 안배하셨습니다. 

 

7.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최초의 역사적 계시는 종교나 신의 존재가 인간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 인격적인 유일신으로 당신이 창조하신 인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개입을 하고 계시다는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무리 안에서 시작된 이 역사적 계시를 배경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이 위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역사 안에서 계승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해방의 과제가 영적이고도 보편적인 차원으로 심화시키고 확대시켜서 지속되기를 바라시며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현실도 인류와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두 번째 계시명제입니다. 

 

8. 가톨릭 교회는 이 두 가지 계시적 명제가 던져주는 빛으로 사회 현실을 관찰하고 영적으로 판단하여 사도직으로 실천해야 함을 사회교리로 확립한 바 있습니다. 두 가지 계시명제에 응답하기 위한 실천명제입니다. 즉, 인류를 원죄에 묶어놓고 있는 마귀는 구조악으로써 암약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고 이 구조악의 마귀 권세는 혼자서나 한 번의 노력으로써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으므로 서로가 함께 지속적으로 공동선을 실천함으로써만 대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싸워야하되, 공동선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공동의 노력으로 끈질기게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유혹 기사의 메시지가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저항과 싸움을 촉구하는 것이라면, 제1독서에 나오는 신명기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선택을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선택하고 연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한편 실천해야 할 공동선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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