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주여,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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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주여, 임하소서

 

1사무 26,2.7-9.12-13.22-23; 1코린 15,45-49; 루카 6,27-38

연중 제7주일; 2019.2.24.;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평지설교를 전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행복을, 부유한 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 즉 기본 윤리 강령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적어도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지 않으면 우리도 남이 원하지 않는 바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최소 목표이며,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최고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사랑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사랑을 먼저 주셨다는 것과 또한 동시에 그들이 그 사랑을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은 받지 못하고서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내 줄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사랑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신앙인들과 이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는 대전제 역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느냐, 그리고 그 사랑이 예수님으로 인해 확인되었음을 깨달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체험의 넓이와 그 깨달음의 깊이에 비례하여 신앙인들과 교회의 사고방식과 활동양식이 달라집니다. 

일상생활에서나 대인관계에서 한 개인의 처신을 보면 그가 믿는 하느님을 해석할 수 있고 그가 받았다고 깨달은 하느님 사랑의 질과 양을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공동체나 한 시대의 교회가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처신을 보면 하느님과 예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깊이와 신앙의 수준을 해석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결정합니다. 

 

2. 이렇게 하느님의 자리와 그분을 믿는 신앙의 영향력을 일깨워줌으로써 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즐겨 부르는 성가가 있습니다. 바로 가톨릭 성가 151번, ‘주여 임하소서’입니다. 부제 시절 저는 본당 주임 신부께서 맡아하시던 예비자 교리반 수업을 방학 동안 한 달 정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교리 수업을 하기 전에 매번 성가 한 곡씩 가르쳐드렸고, 당연히 저도 좋아하던 이 151번 성가도 가르쳐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 교리 수업에 당시 50대 중반의 아저씨 한 분이 목이 다 쉬어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웬일이시냐고 여쭈었더니, 지난 주 수업에서 그 성가를 배운 다음에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서 직장에 휴가원을 내고 산에 가서 그 성가만 목이 다 쉬도록 하루 종일 부르다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성가의 어느 가사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으셨느냐고 다시 여쭈었더니, 다 좋지만 특히 1절에 나오는 ‘암흑에 헤매는 한 마리 양“이라는 가사가 마음을 울리더랍니다. 예비자 교리반에 나와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보니 왜 진작에 이 좋은 진리를 찾아 나서지 못하고 젊은 시절에 허송세월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후회막급이더라는 것이지요. 

 

음악학자 정이은 교수가 경향잡지 2월호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이 곡은 이례적으로 19세기 미국의 작곡가 로웰 메이슨(Lowell Mason)이 작곡한 성가 베타니(Bethany)을 편곡한 노래라고 합니다. 정 교수의 회상을 따라가 보면, 이 성가와 관련된 사연은 더 있습니다. 영화 타이나닉호에서 이 배가 침몰하던 순간 아수라장 같던 그 탈출 상황을 차분하게 진정시킨 음악이 이 ‘주여 임하소서’라는 성가였다는 겁니다. 

 

1997년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제작한 영화 타이타닉은 1912년에 영국에서 미국까지 향하던 거대한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선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하게 빠른 속도로 항해하다가 안개에 가려 있던 거대한 빙산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바람에 침몰해 버린 실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 배가 서서히 침몰해 가던 시각, 네 명의 연주자가 배에서 탈출하는 승객들을 위해서 연주하다가 자신들도 탈출하기 위해 악기를 들고 일어서려는 그 순간에, 윌리스 하틀리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주여, 임하소서’를 홀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율만 들어도 그에 담긴 가사의 뜻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유명한 곡이었습니다. 그러자 망연히 듣고 있던 다른 주자들이 구명선 타기를 포기하고 즉 배와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 합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수라장이던 침몰과 탈출 현장의 소음을 다스리고 고요한 생명과 죽음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영화는 이 음악을 배경으로 탈출과 침몰의 여러 장면들을 주마등처럼 보여주었습니다. 탈출을 포기한 채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자장가를 들려주며 안심시키는 엄마도 나오고, 손을 꼭잡고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노부부, 겨우 올라탄 구명보트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사랑의 순간을 추억하는 주인공 연인도 나오지요. 이들의 지난 날을 보여주는 기억과 함께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현재를 보여주는 영상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물과 함께 뒤엉켜 가는 그 혼란의 순간, 이들을 향한 구원의 빛은 여객선에서 음악가들이 연주하던 ‘주여 임하소서’에서 나옵니다. 

살아남든 죽든, 다가오는 모든 운명을 자연에 맡길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 그 성가의 선율은 ‘태양과 같으신 사랑의 빛으로 찾아오소서’라는 1절 후렴 가사라든지, ‘오 내 주 천주여 받아주소서’나,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소서’하고 상기되는 2, 3절의 후렴가사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미사 중 영성체 때 자주 들었을 가톨릭 신자라면 더욱이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게 만들었을 노래였습니다. 

 

3. 사도 바오로의 고백어린 진술대로, 생명을 주는 영적인 존재이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살이에서부터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그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꼭 그만큼, 또 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바로 그만큼 우리가 참생명을 살아갈 수 있고, 이 참생명의 선한 기운을 다른 이들에게 줌으로써 세상을 하느님 나라에로 나아갈 수 있게 변화시킨다는 가르침입니다. 

마귀가 호시탐탐 노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나라의 참된 행복을 스스로 발로 차 버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 욕망을 미끼로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죄는, 가볍든 무겁든, 크든 작든, 혼자서 짓든 여럿이 짓든,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습니다. 그래서 더 나쁜 죄는 구조적인 죄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에 물들이고 죄를 저지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죄에 물들이게 하는 죄를 더 큰 죄악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태연하게 저질러서 다른 이들까지도 죄를 저지르게 하는 이들을 닮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윤리적 요청을 단지 또 다른 계명처럼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하느님께 관한 아무런 믿음도 깨달음도 없는 처지에서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이 요청을 수락할 수 있습니다.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는 그 사랑을 받았다고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셨듯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 역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선포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4.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부하 삼천 명을 데리고 추격하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사울의 권위를 존중했고, 그에게 그 권위를 부여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아직 왕이 되기 전부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성덕은 그가 왜 역대 이스라엘 임금들 중에서 ‘성왕’ 즉 거룩한 임금이라는 존경을 받는지, 그 까닭을 설명해 줍니다.

 

5.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코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나라 안팎의 사정이 시끄럽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지 않는 일본이 종전선언을 반대하고 있고, 어처구니 없게도 자유한국당이 그에 장단을 맞추고 있습니다.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을 가리는 망언을 일삼는 그 당 의원들과 이에 부화뇌동하여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좀비들이 국민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진실이 알려질수록 그 허접함이 드러나는 정치 모리배들이라든지, 사법농단을 일삼았던 위선적 법관들에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하는 기레기 언론이 보는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도 종교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심지어 가톨릭 신앙인까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나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 체험이나 깨달음이 빈약하거나 허접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들에게 물들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존재가 되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죄악을 태연자약하게 저질러서 세상을 죄로 물들이지는 이런 자들보다 더 정의롭게 처신하는 것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자비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고 이를 본받으려 노력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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