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에게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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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민수 11,25-29; 야고 5,1-6; 마르 9,38-48
2021.9.26.; 연중 제26주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고발하고 그 대책으로서 하느님의 영이 신자들에게 내려지기를 촉구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자들이 가진 재물에 만족하기는커녕 더 가지려고 없는 자들의 재물까지 빼앗으려 하는 세태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매우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며 경고하였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도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야고 5,1-4).

 

  예수님께서도 악인들이 조장하고 죄인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내리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네 발이 죄를 짓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2-47).

 

  이러한 심판의 언어들이 모자랄 만큼 어마무시한 죄악들이 나라의 정책으로 버젓이 시행되는 바람에 온 나라가 지옥으로 변하고 극소수 양반들만 천국이었던 시대가 조선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천주교 신앙을 들여와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 보려던 사람들이 양반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지만 또한 천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순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를 지어 주어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역시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불어 넣은 정약종이 있었습니다. 

 

  양반 대신들은 그를 끌어와서 모진 고문을 가하며 이렇게 심문하였습니다. 

- “정약종, 너의 사호(邪號)는 무엇이냐?” 

- “아우구스티노다. 사호가 아니라 세례명이다.” 

- “해괴하구나. 네 아비가 지어준 본명을 버린 까닭이 무엇이냐?” 

- “본명(本名)으로 돌아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남이다.” 

- “너는 반가(班家)의 자식으로 태어나 반듯한 인성을 갖추었을 터인데, 어찌 헛것에 들려 있는가. 너의 이른바 천주가 실재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있음을 네가 증명할 수 있느냐?” 

- “증명할 수 있다. 쉬운 일이다. 어린 아이가 웃으면서 걸어올 때, 나는 천주가 실재함을 안다. 그대들이 국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가두고 때릴 때 저들의 비명과 신음이 천주를 증명한다. 그대들의 악행을 미워하고 또 가엾이 여기는 내 마음을 통해서 천주는 당신을 스스로 증명하신다.”

-  "저 독종을 매달아라. 매달아서 더욱 쳐라!”(김훈, 소설 「흑산」 중에서)  

 

  이것이 정약종의 신앙 감각이었습니다. 햇빛을 받은 입사귀가 뿌리에서부터 수분을 끌어 올려 양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태양에서 내리쬐이는 성령의 빛을 신앙 감각이라는 입사귀가 받아서 성체성사라는 광합성 작용으로 공동합의성이라는 양분을 만들어냅니다. 공동합의성은 교회라는 나무의 생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입니다. 복음 선포라는 꽃을 피우고, 복음화라는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양분입니다. 

 

  교회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뿌리는 부활 신앙이요, 꽃은 복음을 선포할 사도와 선교사이며, 열매는 복음화된 백성입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음은 꽃이 피지 않기 때문이고, 꽃이 피지 않음은 뿌리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화가 되지 않아서 우상숭배가 판을 쳐서 정의가 사라지고 진리가 가려지며 자유와 평등이 메마르는 무신론 현상이 만연하면 복음을 전할 사도와 선교사가 없기 때문이고, 사도와 선교사가 사라졌거나 줄어든 이유는 부활 신앙이 아예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이 약하거나 사라지면, 기복 신앙이 기승을 부리고 교회 안에 섬김과 사랑이 사라지고 다스림과 무관심이 팽배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스승의 예고를 세 번이나 듣고서도 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만, 오늘날의 제자들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뿌리가 부실한 나무처럼 교회가 시들어가는 것이고, 교회가 이 모양이니 세상에 죄악이 갈수록 만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시대의 징표를 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부활은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중에 알게 될 따름이지 십자가를 짊어질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영혼이 종말에 부활한다면 그런 수준의 인식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유다교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미래로 유보되는 부활은 낮은 수준의 종교적 인식이지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부활했는지 안 했는지 입증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질 만한 현재진행형의 부활 신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일 수 있었고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부활 신앙의 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그것도 가득히 그 영을 현재진행형으로 받으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우리 자신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고 인류가 삽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을 역대 교황들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온 가톨릭 신자들에게 안내하고자 1983년부터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 등 최근 역대 교황들이 줄곧 강조해 온 깃발이, ‘새 복음화, 새 교회’입니다. 특히 2013년에 교황직에 오른 직후에 「복음의 기쁨」이라는 교황권고문을 낸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 복음화와 새 교회로 나아가는 길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즉위 다음 해인 2014년에 「교회 생활의 신앙 감각」을 내셨고, 2018년에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 있어서의 공동합의성」이라는 제목의 교황 권고문을 내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을 나무에 비유하여 풀이해 드렸는데, 거듭 말씀 드리지만 교회라는 나무의 뿌리는 부활 신앙이며, 이는 죽은 후 언제일지 모르는 종말 때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더군다나 도무지 입증될 수 없게끔 영혼이 아무도 모르게 되살아나서 영원히 살게 되는 그런 일도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삶에서 보여지듯이,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십자가를 짊어질 만한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 순교 선조들과 정약종에게서 보았듯이 교회 안에서나 사회적으로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우리 교회의 자랑인 것이며 우리 민족에게 기쁜 소식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부활을 앞당겨 사는 신앙을 지녀야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움트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 감각이란 이 부활 신앙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입사귀이며, 성체성사라는 광합성 작용을 통해서 공동합의성이라는 양분을 만들어내어 교회라는 나무를 살아있게 합니다. 그래야 새 복음화도 이루어지고 새 교회도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하느님의 얼이신 성령을 받아 신앙 감각의 얼이 새로워지면 생겨날 수 있는 일입니다. 모세의 말대로,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깨어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주일에 제가 전해 드리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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