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왜 예언자가 배척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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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제 2,2-5; 2코린 12,7-10; 마르 6,1-6
2021.7.4.; 연중 제14주일; 이기우 신부

⒈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언자가 배척을 받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마저도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는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도 역시 외부에서 오는 박해는 물론 가시가 몸을 찌르는 듯한 병고까지도 겪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전해줍니다. 왜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예언자에게 반항을 하는 걸까요? 또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은 고향 사람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게다가 고생하며 선교하는 사도에게 축복이 내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일까요? 

 

⒉ 여기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으로서, 에덴 동산의 창조설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조성하시고 사람을 지어내실 때부터 하느님께 대적하고자 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이 존재도 영적인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서 마귀 혹은 악마라고 불리웠습니다. 설화에서는 사람을 유혹하는 뱀의 형상으로 출현합니다. 결국 사람이 이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느님께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이 에덴 동산의 바깥에서 악마는 더욱 기승을 부리며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악마의 유혹과 이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이 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자유의 투쟁입니다. 

 

⒊ 악마는 사람들의 자유가 악으로 기울어지도록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심어놓으신 양심은 악이 아니라 선에로 지향하도록 하느님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악과 선의 싸움은 세상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벌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으로 향하려는 자유 안에 현존하십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선으로 향하려는 사람들의 증거를 통해서만 드러나실 수 있습니다. 

 

⒋ 예언자는 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에제키엘도 남유다 왕국의 사제로서 사람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받은 예언자적 소명은, 하느님께 거역하다가 유배로 벌을 받고 있는 동족들에게 자신들의 죄악을 일깨워주고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반항의 자손들”을 향하여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⒌ 구세주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강생의 신비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던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축복받은 사람들일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정배였던 요셉이 얼마나 충직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는지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마리아의 부모나 마리아 자신까지 집안 전체가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하고 신심깊은 사람들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일어난 이 강생의 신비를 그들은 곡해하기 바빴습니다. 에수님을 두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사생아라는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잉태의 가능성은 물론, 아버지 요셉의 의로움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신론자처럼 이렇게 평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⒍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박해자였던 사울이 선교사가 된 후에 겪게 된 어려움들을 사도적인 안목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에제키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또 예수님 당시의 나자렛 마을 사람과도 달리 그는 믿음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약해지기도 했고, 모욕도 받았으며, 재난이나 박해나 역경도 겪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몸에 가시가 찌르는 듯한 지병을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느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자만하지 못하게 하느님께서 배려해 주신 몫으로 여겼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악마라고 하더라도 사도 바오로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악마가 쳐 놓은 역경의 덫을 피해 선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는 선교활동 중에 만난 어려움을 통해 더 성숙해졌습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선교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이 되고 해답을 주는 모범입니다. 

 

⒎ 교우 여러분, 좋은 일을 해도 어려움은 닥칩니다. 그 어려움은 좋은 일을 하기 때문에 닥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딛고 도약해야 하는 발판입니다. 담금질을 거치지 않는 쇠는 강해질 수 없고, 바다를 항해하는 돛단배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법입니다. 예언자와 사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척을 받으신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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