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진리의 부르심에 목숨 바쳐 응답한 성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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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리치와 이벽의 경우

사도 4,8-12; 1요한 3,1-2; 요한 10,11-18 
2021.4.25.; 부활 제4주일;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성소주일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특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지향을 두고 기도하며, 성소 육성에 필요한 협력을 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⒉ 그런데 사제, 수도자,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성소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누군가 하느님 신앙이라는 씨앗을 뿌려주어야 싹이 틀 수 있는 법입니다. 대개는 신자 가정에서 부모의 신앙을 비옥한 토양으로 해서만 가능한 은총입니다. 따라서 사제, 수도자, 선교사를 위한 성소와 함께 이 성소주일의 지향에는 혼인 성소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혼인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맺어진 부부가 나자렛 성가정을 기준으로 삼아 가정 성화를 이룩하겠다는 다짐으로 혼인 성사의 은총을 수용하는 것이기에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시작이 됩니다. 

혼인 성소가 모든 성소의 시작이라면, 혼인 성소를 축복하는 것은 혼인 성사입니다. 그리고 혼인 성사를 비롯한 성사는 교회가 세워져야 가능한 것이고, 혼인 성소에서 비롯되어 뿌리내리고 싹을 틔운 사제와 수도자 및 선교사 성소도 교회에서라야 꽃을 피울 수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는 것이기에 성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교회에 입문하는 세례 성사요 또한 이 세례 성사를 가능하게 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⒊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신앙 진리를 믿을 수 있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했으며, 따라서 모든 성소를 가능하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선각자는 마테오 리치와 이벽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진리의 구도자로서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전하라는 부르심에 목숨을 바치고 일생을 바쳐 응답한 성소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서양 선교사로서 16세기 중국에서, 또 한 사람은 양반 출신 선비로서 18세기 조선에서.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서 중국에 파견되어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 등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던 ‘상제(上帝)’의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의 하느님이심을 한문 서적으로 저술하여 상제를 모르고 살아가던 중국 선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고, 또 이벽 세례자 요한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 고전에서 발견해 낸 그 ‘상제’ 개념은 한민족으로부터 전래된 ‘천(天)’의 개념으로서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이미 숭배하던 하늘이었음을 알아보는 한편 유럽 가톨릭교회가 전해 준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담은 책을 써서 한국인들에게 예수님과 교회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⒋ 이 두 선각자가 이렇듯 위대한 진리에의 성소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보겠습니다. 마테오 리치(1552~1620)는 로마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던 중 예수회에 입회하여 동양에 선교할 꿈을 품고 인도 고아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1582년에 예수회로부터 중국으로 선교하러 가라는 지시를 받고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한문 그리고 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중국 선교에 있어서 그가 봉착한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민족들은 다 미개하며 야만적인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있었다는 편협한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공자는 기원전 3세기 경에 이미  상제라는 인격신을 전제하여 시경과 서경을 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유학자들이 해석한 주석대로 비판 없이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무신론적인 가치관입니다. 

 

⒌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는 지도를 제작하여 세계의 실상을 알려 주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도 한문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이때 제작된 중국 최초의 세계 지도가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입니다. 또한 공자가 저술해 놓은 시경과 서경에서 음양과 태극의 이치만이 아니라 이를 조성하신 인격신으로서 ‘상제’ 개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 ‘상제’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이라고 논증한 책이 ‘천주실의(天主實義)’입니다.

마테오 리치는 유학의 가르침을 전부 수용하면서도 단지 상제를 천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 신앙 진리로 보충하려는 입장에서 천주교를 전하고자 했기 때문에 당시 명나라 지식인들에게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補儒論)은 원시유교와 천주교의 동질성을 철학적인 체계와 이론으로 논증함으로써 당시 중국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착화시키는 합리적인 인식체계를 세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유교의 뿌리를 되찾아 준다는 명분이 있었던 덕분에 거부감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대 수많은 중국 사대부들이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⒍ 더군다나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 지식과 문물을 함께 소개했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적 입장은 지적으로도 권위가 있었으며, 공허하고 관념적인 이기론(理氣論) 논쟁을 일삼던 성리학밖에 알지 못하던 조선 선비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새 학풍은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실학(實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1779년에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의 배경입니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출판한 이후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 책을 독서와 연구의 교재로 삼아 토론하기까지 시차가 18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벽은 5대조 할아버지였던 이경상으로부터 이 책을 포함한 천주교 서적들을 물려받아서 어려서부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임금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왕세자를 볼모로 중국에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에서 8년간이나 머무르면서 독일 출신 예수회 소속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탕약망), 1591~1666) 신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귀국하면서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벽은 다른 선비들에 비해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실학을 주제로 하여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는 이벽이 합류하면서부터 천주학 강학회로 성격이 전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⒎ 천진암 강학회의 주제가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과학기술 서적을 탐구하던 실학에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학(西學)으로 전환되면서 이벽을 위시한 선비들은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저술하기 위해 ‘상제’ 개념을 발견해 낸 중국 고전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한국 고전에 이미 ‘천(天)’의 개념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천행사와 각종 민속 등으로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선조들이 하늘을 숭상해 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저술해 놓은 천주교 교리를 외래 사상으로가 아니라 주체적인 시각에서 학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저술한 책이 ‘성교요지(聖敎要旨)’이고 이를 다시 한글로 풀되 4·4조 가사로 만든 노래가 ‘천주공경가’입니다.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고, 이승훈은 ‘십계명가’를 지었습니다. 그 후 부친이 동지사 수행원으로 가게 된 이승훈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아 오도록 북경으로 보내기로 한 배경이 이러했습니다. 

 

⒏ 그 결과 천주교 신자가 된 이승훈이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과 정씨 형제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정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한양의 선비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벌였고, 한 해 동안에 1,000명이 넘은 세례자를 얻을 정도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테오 리치가 당시 명나라 지식인들에게서 얻은 호응 정도보다도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이 조선에 내려오던 사상과 전통의 뿌리이며 정수인 천지인 사상을 확인해 주었다는 자부심도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에는 마테오 리치가 유학을 천주교가 보충한다는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선교를 시도했다면, 이벽은 유학이 아니라 전통 천지인 사상을 천주교로써 완성하게 되었다는 관점에서 선교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로써 공자의 원시유학을 소개한 덕분에 주자가 주석해 놓은 성리학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이를 디딤돌로 삼아 한민족 본래의 천지인 사상을 통해서 신앙 진리를 펼칠 수 있었던, 사상의 혁명이었습니다. 

 

⒐ 그리하여 지식인들을 선교하고자 한문으로 쓴 ‘성교요지’의 내용을 한글로 풀어서 서민 대중에게 선교하려던 ‘천주공경가’에는, 효(孝)와 충(忠) 같은 유학적 가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진 유학 경전을 알지 못해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조상대대로 믿어온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고 알아 왔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선교 역사에서, 이벽과 이승훈이 문중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이어서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지하고 박해를 무려 백 년 동안 가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층 신자들은 떨어져 나갔어도, 한문을 알지 못하던 중인 이하 서민 출신 신자들은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차라리 치명을 함으로써 천주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거나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이루며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했던 놀라운 선교 역사의 비결이 이러하였습니다. 

 

⒑ 교우 여러분! 이탈리아를 떠나 낯선 땅에서 20년 넘게 한문과 유학을 배우다가 마침내 중국 고전에서 ‘상제’ 개념을 발견했을 때 마테오 리치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른지 상상해 보십시오. 편협한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무신론의 세상을 복음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벅찬 꿈을 가슴에 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쓴 ‘천주실의’를 읽고 난 이벽이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하늘의 뜻이 서양 천주교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로 전달되었을 때,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닌 중국이 전해준 성리학을 종교처럼 신봉하느라 답답한 조선을 개혁하고 신앙의 진리로 민족을 복음화하는 꿈을 꾸며 가슴이 설레고 벅찼을 그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테오 리치와 이벽 세례자 요한이 받은 성소 덕분에 진리는 이렇듯 오묘한 방식으로 이 땅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진리를 밝히 알고 또 전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성소입니다. 진리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바탕 위에서 혼인 성소는 물론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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