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우리가 사도로 변화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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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 3,13-15.17-19; 1요한 2,1-5ㄱ; 루카 24,35-48 
2021.4.18.; 부활 제3주일; 이기우 신부

⒈ 부활시기에 봉독되는 전례 독서의 말씀은 사도로 변화된 제자들의 눈부신 활약상에 대해서 여러 모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야만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이유와 목적도 여기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믿는 이유와 목적 또한 이것입니다. 

 

⒉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실존적 기반, 즉 신체적인 상태는 기본이고 감정과 정서 등의 심리적 날씨를 비롯해서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정신적인 정체성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기 마련이고, 그 반대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자기 부정 내지 자기 모순으로는 정상적으로 생존하거나 행동하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믿음이 약했을 때에 그리도 소심하게 행동했던 것이나, 부활에 관한 믿음이 굳세어졌을 때에 그리도 용감하게 행동했던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치 차원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들도 어부, 세리 등 자기가 선택한 여러 가지 생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더군다나 각자의 가정까지 이룬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당신을 따라 오라는 부르심을 들었을 때에 그 직업과 가정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서는 데에도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는 자신의 결단에 따른 부담이 워낙 커서 그분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워낙 분명해졌기 때문에 일생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이 제자들이 사도로 변화된 데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믿음이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⒊ 예수님께서는 불특정 다수의 이스라엘 군중을 상대하셨던 복음선포에 못지않게 불과 열두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복음선포 활동을 케리그마라 하고 제자 양성 활동을 디다케라고 부르는데, 정성으로 말하자면 케리그마에 못지않아서 예수님께서는 디다케에 있어서도 지극한 정성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들을 당신을 이어 복음을 선포할 사도로 양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 제자로 뽑으실 때에는 당신의 케리그마를 따라 다니며 듣던 군중 가운데에서 당신 눈에 든 사람들을 고르셨을 것입니다. 필시 더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 하나하나 떠올리시며 열두 명만 선발하시느라고 밤새 기도하여 선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케리그마에서와 달리 제자들에게는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따로 더 자상하게 풀이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배우는 도중에 제자들이 실수를 할 때에도 천편일률적으로 대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각자에게 맞게 그들이 깨우칠 수 있도록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⒋ 또한 그분이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도 케리그마나 디다케나 만만치 않았습니다. 케리그마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를 살펴보자면, 군중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고, 기적이라도 일으켜서 도움을 주면 감사하거나 믿음을 간직하기는커녕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수가 다반사였으며,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익이 보이면 막무가내로 몰려들어 조르기도 하다가 막상 예수님께서 어려움에 처하시자 각자의 일상사에 매몰되어 외면하기 일쑤였고, 함구령을 내려도 다짜고짜로 소문을 내서 퍼뜨리는가 하면, 이로 인해 유다교 지도층이 예수님을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게 되고 급기야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게 되고 말았습니다. 

 

⒌ 하지만 디다케로 말미암은 십자가는 이보다 더 컸습니다. 제자들은 더 자상한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알아들을 귀가 모자랐고, 스승의 명성이 높아지니까 우쭐해서 세속적인 기대를 품기도 했으며, 서로 간에 서열 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그 많은 기적을 눈으로 보고도 믿음이 부족해서 야단을 맞아야 할 지경이었으며, 동료 한 명이 스승을 배신할 마음을 먹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관심이 산만했고, 급기야 스승이 체포당하시는 데도 의리 없이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는 등 졸렬하게 처신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스승이 숨을 거두실 때에는 곁을 지키지도 못했고, 게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무덤에 가 보기는커녕 자기들도 잡혀갈까봐 비겁하게 숨어 있었던 겁쟁이가 그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께 안겨 드린 십자가 중에서 부활하신 후 그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던 사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⒍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세 번의 발현 중에서 처음에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시며 당신을 드러내셨는데, 이 꾸짖음은 여인들에 의한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도 믿지 않는 데 대한 꾸짖음이지 동산에서 도망을 친 행위나 비겁하게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처신에 대한 꾸짖음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는 평화의 인사를 건네심으로써 제자들 모두가 동산에서나 다락방에서 저지른 배신의 죄를 모른 척 해 주시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구운 물고기로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도 보여주시는가 하면, 평소보다 더한 정성으로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심으로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에 가르쳐 주신 모든 진리의 가르침도 뒤늦게나마 확실하게 믿게 된 일은 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했으며 특히 스승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 외면했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박해를 받을 때,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는 것은, 모욕을 받은 일이 기뻐서가 결코 아니었고 단지 그분께 지은 죄가 너무 컸다는 죄책감이 밀려와서 느끼게 된 마음의 빚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 불쾌한 모욕이 오히려 스승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뒤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겼고, 그리하여 그 죄와 마음의 빚을 덜 수 있는 기회로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⒎ 그러므로 사도들 가운데 가장 크게 뉘우친 베드로는 자신의 회개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가운데 유다인 군중에게도 서슴없이 회개하라고 호소할 수 있었고, 그의 이런 호소는 자신의 회개를 전제한 것이었기 때문에 진정성이 있었습니다(사도 3,15.17.19).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서 배웠던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매우 설득력 있게 가르치고 편지를 썼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게 되고, 그분이 확실하게 용서해 주셨음을 확인하고 나자, 제자들은 예전에 없었던 담대한 믿음이 생겼고 굳센 용기가 우러났을 뿐만 아니라, 지난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던 바를 신기하게도 일목요연하게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께 관한 사도들의 믿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신앙 고백 열두 조문 가운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당연히, 말씀 전례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도 예수 부활을 믿는 신앙 고백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성찬 전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의 현존을 기반으로 거행됩니다. 성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주체가 되어 거행하시는 오늘날의 발현 양식인 것입니다. 이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사제는 미사에서 시작 때와 마침 때와 또 중간에 복음을 봉독하거나 예물을 봉헌하거나 성체를 영하는 등 중요한 순간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예수님의 인사를 대신 전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경우에 미사에 참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현존을 종종 망각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을 방불케 합니다. 그래서 미사 중에 하는 예수님 현존의 인사를, 한 번만 하면 될 것 같은데도 무려 네 다섯 번이나 되풀이해서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⒏ 우리 편이 이렇게 답답한 반면에 저쪽 편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악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했었던 것 같습니다. 밀고자를 이용하여 체포한 과정이 그러했고, 빌라도를 윽박질러 사형 언도를 유도해 낸 과정이 그러하며, 사두가이들이 혁명당원들과 짜고 바랍빠 석방을 대가로 군중을 선동하게 만든 야합행위가 그러하고, 바리사이들 또한 빈 무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경비병들을 매수한 행위가 또한 그러합니다. 이렇듯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는 갑자기 똑똑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생전에 도움을 받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애를 썼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 역시 나름대로 머리를 많이 썼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마귀 들린 딸을 고쳐보려고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강아지도 주인이 상에서 흘린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느냐는 기발한 논리로 그분의 양보를 끌어냈으며, 로마인 백인대장은 죽을 병에 걸린 자기 하인을 고쳐주기 위하여 극진한 예우로 예수님을 감동시키기도 했었습니다. 빵의 기적 당시에 군중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하여 갈릴래아 호수를 거의 반바퀴 돌아서 그 먼 거리를 쫓아오기도 했었지요. 이렇듯 사람이 자기 이익을 도모할 때에도 머리를 많이 씁니다. 

 

⒐ 하지만 사람이 죄나 이익이 아니라 선을 위해서 행동할 때에는 그렇게 머리를 쓰지 않고 답답하게 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자 하면 그 선한 지향만으로도 일이 저절로 완성될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성의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도 세상의 일 못지않게 머리를 써야 합니다. 인내도 발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처신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케리그마에 있어서나 디다케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셨으면서도 억울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던 이유와 근거는 부활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부활 신앙으로 정체성을 확실하게 심어주심으로써 변화시키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신앙 진리의 공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도 십자가를 각오하고 부활에 관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지향이 풍성한 결과로 돌아옵니다. 단,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려고 하면 안 되고, 다음 사람이 그 열매를 거두리라는 밀알의 이치를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놀랍게 변화된 제자들처럼 우리도 사도로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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