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순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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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 50,4-7; 필리 2,6-11; 마르 14,1-15,47 

2021.3.28.;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기우 신부

  교회는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성주간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교회의 전례주년 가운데 가장 경건한 때입니다. 이 기간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기념합니다. 전례주년 전체의 정점을 이루는 성주간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그분의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시켜줍니다. 그래서 성주간 전례는 사순 시기로부터 부활 시기로 건너가는 전례력의 징검다리입니다. 

  성주간의 첫날인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모두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성주간 월요일부터 성금요일까지 거행할 전례기념을 미리 그리고 모두 보여줍니다. 성주간 전례의 전체를 조명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기되는 바는 예수님 생애 최후 일주일 동안에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지만 이뿐만 아니라 생애 전체에 대하여, 이사야는 예언자로서 조명하고 바오로는 사도로서 증언합니다. 이사야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바오로는 직관적으로 상기합니다. 

 

  이사야의 묘사는 마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듯이 매우 구체적이며, 모두가 민족적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메시아를 꿈꾸고 있는 터에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당하실 고난을 1인칭 화법과 현재 시제의 표현으로 전하고 있어서 아주 실감나는 예언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있는 유배지에서 메시아께서는 이민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시리라고 예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인 예언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아주 실감나게 구체적으로 전해 주는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께서는 하느님과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일깨워주시는 대로 귀를 열어 들으셨고, 하느님께서 말씀하라시는 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때는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 듯이 들으셨고, 말할 때면 삶에 지친 이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셔서 메시아께서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모욕과 수모를 주는 대로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와 달리 하느님 앞에서는 전혀 수치도 부끄러움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놀랍게도 5백여 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실제 고난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내다본 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도 야합하여 은밀하고도 조직적으로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몄고 로마인 총독 빌라도의 권세를 이용하여 예수님께 매질하게 하였고, 뺨을 때리게 만들었으며,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모욕과 수모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후에 바오로는 사도로서 소아시아 일대와 그리스 지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필리피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예수 수난을 목격한 세대가 이미 세상을 떠난 시기였고 더구나 필리피 신자들은 유다인도 아닌 그리스 사람들이어서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이었으므로 한결 차분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증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8). 이것이 자기비허(自己脾虛)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신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이처럼 놀라운 희생으로 바칠 수 있음이야말로 거룩한 신성(神性)의 진면목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Jürgen Moltmann, 1926~)이라는 신학 명제가 나오게 되었고, 파스카 과업과 해방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강조하는 신학사조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려는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일꾼으로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전망으로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이치는 이러한 신학 명제가 밝혀준 공헌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에 의해서만 동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자기비허의 그리스도를 설파한 바오로는 즉시, 부활의 영광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필리 2,9). 예수님처럼 창조의 전망으로 십자가 고난을 짊어지려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고난의 이유와 보람이 분명해야 고난을 받아들이려는 투신이 진지해지고 확산될 수 있으며 또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그분께 경배드리는 근거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교우 여러분, 경건한 성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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