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보라, 그날이 온다

44

본문

예레 31,31-34; 히브 5,7-9; 요한 12,20-33 
2021.3.21.; 사순 제5주일; 이기우 신부

⒈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예레 31,31). 그는 유배를 당하기 전부터 유다 왕국에서 동족들에게 임박한 멸망을 여러 번이나 경고한 바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다가 앗시리아에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으로 끌려가서도 줄기차게 하느님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그가 전한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이 바빌론 유배는 두 번째 종살이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는 육체적으로는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나, 이집트인들이 자기들만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여겨서, 히브리 노예들은 제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면서 힘든 노동만 시켰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는 우상 제사에는 동원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에서는 강제노역에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앗시리아와 그 뒤를 이은 바빌로니아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숭배하도록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이런 우상숭배 압력에 굴복하게 되면 믿음이 짓밟혀서 양심도 더럽혀지는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맺은 계약도 자동으로 파기되어 버리는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유다인들이 재기할 가능성은 물론 하느님으로서도 당신의 나라를 세울 가능성은 사라지게 될 위기였습니다. 그만큼 양심은 믿음을 위해서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면서, “보라, 그날이 온다.”고 외쳤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상숭배의 압력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 넣기 위하여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 것이었는데,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이러했습니다. 새 계약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 계약을 깨뜨렸다”(예레 31,32). 

 

⒉ 예레미야는 새 계약이 옛 계약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이 두 계약이 과연 어떻게 다를지에 대해서는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 예전에는 돌판에다 새겨 주었지만, 이제는 마음에다 새겨 주겠다는 점에서 다르고, 

- 예전에는 모세를 시켜 십계명을 전해 주어 맺었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몸소 오셔서 사랑의 계명을 전해 주어 맺으실 것이므로 다릅니다.  

- 예전에는 시나이 산에서 이백만 명은 족히 넘을 많은 군중과 단 한 번 맺었지만, 이제는 3년 동안 사도로 양성한 열두 제자와 함께 성체성사로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맺으셨는데 그 열두 사도가 온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여 모은 신자들의 교회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두고두고 계약을 갱신할 것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 예전에는 율법에 세세한 규정까지 두어 십계명을 잘 지키라고 계약을 맺어서 제사를 드리게 하면서 주로 유다인들에게만 법적인 의무만을 부과했었지만 이제는 영적으로 참되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양심의 계약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 예전에는 모세가 사제로서 송아지나 양을 태워서 제사를 바치며 계약을 확인했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몸소 사제이시면서 또한 제물(祭物)이 되셔서 십자가상에서 제사를 바치심으로써 계약을 맺으실 것이므로 다릅니다. 

- 가장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성령의 역할입니다. 예전에는 계약을 맺고도 지도자와 백성이 어겨도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이 그저 민족 전체가 재앙을 겪어야 했지만, 이제는 성령께서 보호하시고 이끄시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이 계약을 맺은 길에서 벗어나면 양심과 심판으로 개입하실 것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⒊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맺는 이 새로운 계약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는 고난의 모습과(히브 5,7),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도 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는 영광의 모습을 아울러 띠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는 “보라, 그날이 온다.”고 예언했던 예레미야 이후, 실제로 그 메시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또 다시 로마 군대에 의해 쫓겨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인데, 같은 예언 내용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존재를 근거로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증언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당신을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즉 당신처럼 하느님을 닮게 하시려고 고난의 모범을 보여주셨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을 믿으면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가 세상의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 이후 더 이상의 계시는 없을 만큼 하느님의 계시는 결정적으로 드러났으며 비로소 인간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죄악을 저지르게 하던 마귀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못하게끔 쫓겨나게 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그분이 십자가 위로 끌어 올려지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져온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 효과인데,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의 영적인 효과이기도 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 밀알 효과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순절 날에 사도들과 제자들 무리에게 성령을 내려 보내심으로써 극적으로 보편화되었고, 마치 강장제(强壯劑)라도 맞은 것처럼 하느님 백성의 양심을 강화시켜 극대화시켜 놓았습니다. 

 

⒋ 예수님께서 고별사에서 선언하시고 나서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로 맺으신 계약이 모두 오순절 날에 가장 정확하고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모두들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기운을 가득히 받았기 때문입니다(사도 2,4).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께 바쳐야 했을 제물 대신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성령께서는 흩어진 민족들을 다시 일치시키실 계약을 맺으시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보내시려고 세상을 잠시 떠나셔야 했던 그분은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계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떠남’이라는 대가를 치르시고 ‘현존’이라는 선물로 되돌아오셔서 양심을 이끄시는 주님으로 모든 믿는 이들과 함께 계시게 된 것입니다. 

 

⒌ 성령으로 다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혼에 하느님의 영을 불어 넣어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는 이 혼을 마음 혹은 양심으로 부릅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나빠지거나 마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기 전에 우선 양심을 바르게 잡아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법을 발견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순명해야 할 법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가리켜줍니다. 이 양심법에 순명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며, 우리는 모두 이 법에 따라 심판을 받고 있고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사목헌장, 16항). 

 

⒍ 성령의 빛을 받아 깨끗하고 올바르게 회복된 인간의 양심은 선과 악을 식별하되, 하느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가려내는 일이 먼저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악을 관찰하고, 그 악이 어떠한 죄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것인지 그 뿌리를 판단합니다. 이 점에서 공의회는 양심이 흔들리고 있는 인류의 현주소를 이렇게 진단한 바 있습니다. “실상 현대 세계를 어지럽히는 불균형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힌 한층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사목헌장, 10항). 그러므로 종교의 역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임무 중 시급한 일은 현대 인류가 성령을 받아서 죄악에 물든 바를 치유받고 그 악으로부터 벗어나 바른 양심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공의회는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 악을 피하게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게 하신다는 점도 균형있게 지적합니다. “인간은 한편으로 피조물로서의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고차적인 생명으로 불리웠음을 느낀다. …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음을 교회는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천하에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음을 믿는다”(사목헌장, 10항). 이 장엄한 신앙고백의 실질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느니만큼, 그분의 가르침이 옳다고 양심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 양심에 따라서 행함으로써 선을 증진시키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⒎ 이 사순 시기에 주어진 말씀의 뜻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현실은 심히 어지럽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로 말미암아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연일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 사태를 조속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국제 연대가 절실한데도 국가 간에 백신 확보 경쟁이 마냥 뜨겁습니다. 국내에서는 죄 지은 자들을 공정하게 벌을 주자는 사법개혁이 적폐세력들의 저항 탓으로 지지부진합니다. 토지 거래와 부동산 개발을 맡고 있는 공직자들이 정보를 빼돌려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보도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이런 사태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양심이 심하게 죄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대책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사람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시고 더러운 양심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내치시는 심판입니다.

 

⒏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사람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시고 더러운 양심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내치셨던 일이 노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한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 버리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셨던 노아와 그 가족 여덟 명만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에서 서방으로 가서 바벨탑을 세워 하느님께 맞서려고 했던 이들과 달리 동방으로 가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창세 10,30). 노아의 셋째 아들이 셈이고 그 아들이 아르팍삿, 아르팍삿의 아들이 에베르이며, 이 에베르의 두 아들로부터 세상이 나뉘었습니다(창세 10,25). 큰 아들 펠렉은 아시아의 서방으로 가서 문명을 일으켰는데 펠렉의 후손 중 천하장사라던 니므롯(창세 10,8-9)이 선동하여 신아르 지방에서 바벨탑을 세웠고(창세 11,2) 펠렉의 5대손인 아브람은 니므롯 계열 사람들이 보여주는 우상숭배 문명이 역겨웠던 차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창세 12,1).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창세 12,5.9) 이스라엘 민족의 직계 조상이 되었고, 작은 아들 욕탄은 동부 산악 지방인 세파르까지 나아가서 동이족(東夷族)의 직계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동이족의 한 갈래가 우리 한민족입니다.

 

 욕탄은 후손들에게 홍수 심판의 교훈을 전해주고자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배 선(船)자가 있습니다. 이 글자는 배 주(舟)자와 여덟 팔(八)자와 사람을 뜻하는 입 구(口)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아내와 아들 셋과 며느리 셋 하여 여덟 명이었지요. 그 옛날 노아 때에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진 것을 보시고 홍수로 심판하신 것처럼 마음 아파하시면 큰 일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방주(方舟)인 교회가 필요하지요. 

 

새로운 방주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는데, 이를 지렛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하느님의 개입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지레 받침점이시고, 성령의 역할은 지렛대이시며, 믿는 이들은 무거운 짐을 들려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바른 양심으로 선을 행하려는 믿는 이들은 작은 힘으로도 능히 세상의 죄악을 물리치고 창조의 과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