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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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믿음의 지평: 아브라함, 바오로 그리고...

창세 22,1-18; 로마 8,31-34; 마르 9,2-10 
사순 제2주일; 2021.2.28.; 이기우 신부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로마 3,28; 갈라 3,11). 

⒈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시려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당신께 바치라고 시험하셨는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나이 백 살에 얻었으므로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겼을 외아들 이사악마저 하느님께 바치려고 순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교부들은 이 일이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신 십자가 사건의 예형(豫形)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분부에 따라 이사악을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이 모리야 산 봉헌 사건으로 자신의 믿음을 하느님께 증명해 보였고, 하느님께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봉헌으로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게다가 길이길이 후손을 통하여 받게 될 축복은 믿음의 덤이었습니다. 

 

⒉ 과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하느님께 바쳐진 어린양으로서 살아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도 전에 일찌감치 알아보았지만,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군중은 물론 함께 생활한 열두 제자마저도 십자가 사건 당시에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역설적이게도 박해자였던 바오로가 이 비밀스런 진실을 사도가 된 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사이에 있었던 모리야 산 봉헌 사건이 더욱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재현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류에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이며 인간이 하느님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근거임을 확신하면서 이렇게 설파(說破)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십자가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의 근거입니다. 

 

⒊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渦中)에 우선 세 제자만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당신의 본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그 세 사람은 처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수제자로 임명된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을 맡을 야고보와 당신의 어머니를 모실 요한, 이렇게 세 사람이었으며, 그 높은 산이란 해발 588m의 타볼 산이었습니다. 이 산의 정상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놀라운 변화는 그분이 입고 계신 옷을 새하얗게 빛나게 하신 모습이었고 더욱 놀라운 변화는 느닷없이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가 그분 앞에 나타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었습니다. 

 

⒋ 여기서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변화 중에 첫 번째인 옷의 변화는 실상 옷만이 아니라 그분의 몸이 한처음부터 계시던 모습으로, 즉 하느님의 신적인 모습으로 변한 모습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두 번째 변화인 모세와 엘리야의 소환은 그분이 지니신 신적인 권능의 일단을 발휘하신 것으로서, 율법과 예언이 모두 예수님의 삶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변화를 동시에 성취하는 사건이 나중에 일어날 그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중 이 세 사람에게만이라도 당시에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숨은 본질을 보여주어서 믿음을 굳세게 하고자 하신 것이었는데, 이를테면 이 타볼 산 사건은 부활 사건을 미리 보는 하느님 나라 또는 이미 진행되던 복음선포의 현실에 담긴 본질을 영적인 눈으로 깊이 보게 해 주는 하느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장차 사도로서 활약할 당신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믿음의 목표였습니다. 

 

⒌ 그래서 마르코는 이 사건 보도의 앞뒤에 세 번에 걸친 수난과 부활 예고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즉, 8장에서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예수님께 관한 신앙을 고백하자(마르 8, 29) 수난과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를 하셨으며(8,31), 9장에서 이 거룩한 변모 사건 보도 직후에 두 번째 수난부활 예고를 하셨고(9,31), 제자들이 사도가 될 수 있는 기본 자격으로서 꼴찌가 되어 섬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후에 10장에서 세 번째 수난부활 예고를 하셨다고 보도한 것입니다(10,33-34). 그 사이에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도가 배치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고 교훈적인 배치로 보입니다(9,14-29). 

 

⒍ 그러니까 우리가 더러운 영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영 즉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만 하면,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고 또 씻어주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겠다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믿음으로 섬김의 십자가를 능히 짊어짐으로써 우리도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게끔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⒎ 이렇게 십자가에 근거하고 부활을 목표로 하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이 말은 정의라는 가치가 믿음과 맺고 있는 본질적인 관련성을 말해주는 한편 우리가 제대로 믿자면 정의라는 덕목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즉,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반대로 의롭게 살아야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양심만으로도 족히 의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착하게 살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⒏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매우 종교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렇게 믿음에 대한 거부감이 없이 입교한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주는 그 믿음의 내용은 대개 착하게 산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죄에 대해서는 다들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으로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의 ‘착함’이란 우리가 손해 보지 않고 희생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견딜 수 있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말합니다. 그 결과, 그러한 가치관을 지니고 입교한 신자들의 삶이나 입교하지 않고도 그러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의 삶이 그다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⒐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의’(正義)라는 낱말은 올바른 의로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여기서 ‘옳을 의(義)’자를 분석해 보면, 양(羊)이라는 글자와 ‘나 아(我)’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나 아(我)’자를 뜯어보면, 손으로 창을 들고 자신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옳을 의(義)’라는 한자는 “창을 든 손으로 양을 잡는다”는 뜻이 되는데, 수렵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 행위가 왜 의로움이라는 가치까지 뜻하게 되었는지는 이사악 대신 양을 잡아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믿음을 입증한 성경 기록을 연상해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창세 22,13).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북방 유목민족에게서나 양을 잡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남방 농경민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한자가 창세기를 알고 있는 아시아 서북방의 유목민족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가설(假說)이 그래서 성립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자는 그밖에도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백 오십 살을 넘긴 아주 많은 나이에 세 번째로 얻은 아내 크트라에게서 얻은 아들 중 욕산을 비롯한 아들들을 동쪽으로 떠나보내기도 했습니다(창세 25,6). 

 

⒑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희생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짐이 없이는 올바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희생이 시간적 손해나, 금전과 같은 경제적 손해나, 또는 인간관계에서 상호 간에 생긴 오해나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든지 간에, 무언가 어렵고 힘든 것을 바치면서까지 해 내는 착한 일이 비로소 옳은 일일 수 있고, 예수님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만이 그 희생을 수반한 착한 일을 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설파했던 것입니다. 

 

⒒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는 나라라는 공동체가 고난에 처할 때마다 의로운 희생을 앞장서서 치룸으로써 공동체를 지켜낸 빛나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두 가지만 들겠습니다. 하나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선조 임금은 의주로 피난을 가버렸고, 대신들은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했던 병조판서 이율곡을 파직시켜 버렸으며, 남해바다를 지키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한양으로 불러다가 고문하고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전국에서 일어나 왜군에 맞서 싸운 전사들 중 관군은 1천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신분상 노비(奴婢)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의병(義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의병 전통이 구한말(舊韓末)과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독립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⒓ 또 다른 하나는 백 년 간 지속된 천주교 박해에서 자발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치명했던 순교자의 대다수가 중인 이하 천민 신분의 신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103위 성인, 124위 복자의 품에 오르신 분들의 신분 분석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 중에서도 성직자나 양반 출신 평신도들을 더 기억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실제 통계가 그렇습니다. 당시에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범한 데 대해 분노하여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면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도 없이 치명해야 했던 소위 무명순교자들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희생을 감수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받아들인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⒔ 요컨대,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또 그 반대로 의로운 삶이라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며, 그 의로움이란 막연히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사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려다가 겪는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애초에 실천하려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정도의 선함을 말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도구로 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수 있으며, 또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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