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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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명 18,15-20; 1코린 7,32-35; 마르 1,21ㄴ-28
연중 제4주일; 2021.1.31.; 이기우 신부

⒈ 먼저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원조주일로 정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발표된 2021년 해외원조주일 담화문을 간추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불평등이 코로나 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말미암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는 벼랑 끝까지 밀려난 가장 취약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세계은행이 2020년 6월에 발표한 「세계 경제 전망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19로 약 1억이 넘는 인구가 새로운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징후가 이렇습니다. 가뜩이나 이상 기후로 가뭄이 길어지고 반복되고 있었던 아프리카에서는 농사를 짓지 못하여 심각한 식량난에 빠져 있고, 수퍼 태풍이 강타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더욱 열악해진 주거와 위생 환경 탓에 수인성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난민들이 늘어났지만 국경이 봉쇄되어 생계 수단을 잃고 오로지 외부 지원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인류는 진정한 한 가족임을 깨닫게 되었으며, 코로나 19로 생겨난 새로운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은 고스란히 우리의 아픔으로 전해지고 있고, 서로 돕고 존중할 수 있는 형제애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겪고 있는 지금의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위기 한가운데에서 가장 크게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새로운 희망과 연대의 대유행을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⒉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는 연대의 움직임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을 줄 아는 신앙인들의 특기입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혹심한 노예 노동을 견디며 하느님께 부르짖었던 히브리들을 모세를 시켜 해방시키셨던 하느님께서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기와 같은 예언자가 백성 가운데에서 또 나올 것이라며 그에게 잘 따를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활약한 후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여러 번 위기가 닥쳤습니다. 겨우 세운 왕국이 분열되기도 했고 역대 왕들과 신하들이 우상숭배에 앞장 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강대국의 힘에 짓밟혀서 종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여러 예언자들이 남북의 왕국에 출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권세가들은 하나 같이 그 예언자들을 탄압하고 입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당부를 기억한 아나빔들은 시편으로 이렇게 기도해 왔었습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8). 

 

⒊ 결국, 히브리들의 탄원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동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듯이, 아나빔들의 탄원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이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당신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를 두고 마태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네”(이사 9,1; 마태 4,16). 백성의 탄원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의 응답을 가지고 오신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⒋ 여기서 확인되듯이, 권위란 그럴듯한 말재주에서 생겨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응답과도 같은 신적인 배경이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 말 뜻대로 행동하는 실천이 뒤따를 때라야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권위란 영적인 배경과 실행력을 갖춘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가장 먼저 그분의 정체를 알아본 존재는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이 권위를 알아본 바오로도 자신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분을 본받고자 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17). 그러니까 바오로는 권위 있게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영적인 배경과 함께 그 말씀대로 실행하신 결과로 짊어지시게 된 십자가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행이 일치되지 않았던 당시 바리사이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⒌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악령은 발작적으로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24). 이 악령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본시 선하게 창조하신 사람을 타락시키고 자유를 억압하고 불평등을 조장한 원수입니다. 불의를 조장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부추키고 있는 주범입니다. 이 코로나 19로 인한 세계적 대유행 사태를 맞이하여 더욱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있는 현상에서도 반드시 우리가 식별해야 할 진실은, 빈곤은 이 악령들이 암약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일으켜 주신 여러 기적들 가운데에서 으뜸가는 기적으로 당신 스스로 뽑으신 기적도,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었습니다(마태 11,5). 그래서 악령이 사라지면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또 반대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게 되면 악령이 쫓겨납니다.   

 

⒍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게 그 정체를 드러낸 악령을 단숨에 쫓아내 버리셨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하지만 이미 그 악령의 꼬임에 빠져 만연되고 있는 죄악에 대해서는 단숨에 내쫓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도 솔선수범하시면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섬김과 나눔, 겸손과 순명의 십자가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선한 창의력이 발휘되어야 할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령도 고백했다시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마르 1,24)으로서 내놓으신 처방이요 이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⒎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었던 작년 11월 15일에 집회서 7,32의 말씀을 하여 반포하신 담화문에서,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 가난한 이들 안에 주님께서 현존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형제들끼리 섬겨야 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형제애야말로 우리가 이룩해야 할 문명이며 지켜야 할 공동체이고 존중해야 할 인간적 품위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선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해 주는 대상이 가난한 이들이요, 그 계기가 바로 가난한 이들이 처한 위기입니다.  

 

⒏ 기도하는 이들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현존을 바라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없는 약자들이 벼랑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인류는 국가안보라는 개념 대신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였습니다.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야말로 지켜야 할 대상이요, 서로가 함께 나라와 인종을 초월하여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한다면 국가안보는 사실상 덤으로 얻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⒐ 예수님께서는 인간안보에서 더 나아가서 인간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삶에 대한 공포와 질병, 무지와 불안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건강과 안전, 지혜와 행복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일에 선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를 가능케 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인간을 믿고, 미래를 믿는 마음에서 나오는 이 선한 창의력이 인류를 구원하고 우리 자신을 구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바로 이 점, 즉 일회적인 나눔의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일 수 있는 나눔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선한 영향에 대해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⒑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늘 자극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의 소외감을 덜어주고 고통을 없애 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자면,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가난한 이들이라면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의욕마저도 상실된, 일종의 영적 빈곤 상태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 영적 빈곤에서도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리 자신의 나눔의 능력을 발견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 나눔으로 도움을 받는 가난한 이들의 잠재력까지도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⒒ 늘 그렇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뻗어야 한다는 교황의 메시지는 성모 마리아를 상기시켜 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분이 교회와 믿는 이들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날마다 가난한 이들과 만나는 우리의 이 여정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십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소외받는 이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마굿간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위협 때문에,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 배필이신 요셉과 어린 예수님과 함께 다른 나라로 피신하셔야 했습니다. 성가정은 여러 해 동안 난민으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이 가난한 자녀들과 또 그들에게 봉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며 나누는 그 사랑의 손길로 인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뻗은 손길이 모두를 형제애로 감싸 안는 품이 될 것입니다.” 

 

⒓ 그리하여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백성이, 또 가난한 이들이,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손을 뻗은 이들 모두 마침내는 온 인류가 큰 빛을 보아야 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오르게 해야 합니다. 빈곤과 차별과 불평등의 죄악을 조장해온 악령이 꼼짝없이 쫓겨나가는 상황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악령을 몰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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