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두 차원, 개인과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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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나 3,1-5.10; 1코린 7,29-31; 마르 1,14-20
연중 제3주일; 2021.1.24.; 이기우 신부

 

⒈ 연중 제3주일인 오늘, 우리는 연중시기를 시작하며 들었던 내용을 다시 들었습니다. 바야흐로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찼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선포하셨던 복음이 바로 예언자들이 내다보았던 메시아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이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심차게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마치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수도였던 니네베 사람들에게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요나 예언자의 심정으로(요나 3,4)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요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을 돌려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갈릴래아 사람들과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회개하기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요나 3,5).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수였는데, 아주 예외적으로 바오로가 그것도 매우 극적인 방법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의 뒤를 이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그가 그리스의 코린토에서 행한 복음선포의 현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가난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 안에서 다툼도 있었고 분쟁도 일어나서 사도 바오로가 걱정을 많이 했고 속도 많이 썩였었지만, 코린토의 교우들은 필리피나 데살로니카  등지의 교우들과 함께 그리스 온 백성을 회개 시키고 노력한 결과로, 오늘날까지 그 나라는 정교회가 세워진 그리스도인들의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⒉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을 각성시킨 이 말씀이 오늘 제2독서입니다. 코린토는 당시에도 제법 번성하던 도시였지만, 분명히 사도 바오로는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로마 문명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문명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기로 억누르는 힘의 문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매력을 풍기는 공동체의 문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얼마 남지 않은 때’란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세상의 때이고, 마르코가 소개한 대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미 찬 때’란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때입니다. 우상숭배적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사랑의 문명이 창조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종말의 때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그가 비록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 시민으로서의 교육도 받았고 부모를 잘 만난 덕분에 로마 시민권도 받을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할 수도 있어서 로마 제국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커다란 자유를 받음으로써 한 마디로 로마 문명의 혜택을 잔뜩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 문명의 야만적 성격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예수님을 부활하신 모습으로 만나고 그분을 메시아로 확신하고 난 다음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그가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서 미약하나마 선교적 성공을 이루고 있다 해서 그가 말한 ‘이 세상의 형체’ 즉 로마 문명의 너무도 뚜렷한 한계와 허접한 내실을 눈감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⒊ 다음, 창조의 때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그 이전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에는 바오로 못지않은 인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사무엘과 다윗, 솔로몬과 마카베오 등 지도자들에다가 여러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까지 그 대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내다볼 수 있었을 뿐 직접 선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야말로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때와 겹치는 창조의 때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바야흐로 창조될 것이기에 정치군사적으로 아무리 막강해 보여도 로마 문명과 같은 물질문명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고 사라져야 하며 그 자리에 메시아께서 선포하시는 복음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사랑의 문명으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⒋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사도 바오로는 매우 특출난 실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극한에 가까운 노력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어려서부터 로마식 교육을 받아서 국제적인 교양을 갖추었고 로마군인이 되어도 충분할 만큼의 체력도 길렀습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도 능통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에서 최고급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가믈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까지 배웠으므로, 안팎으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자타가 공인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체험 이후에 무려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과연 예수가 누구인가 라는 한 가지 주제에 몰입하여 씨름할 만큼 내공도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 20여 년 동안 수행한 선교여행을 하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를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체력을 보유했고, 천막을 만드는 중노동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던 정신력도 갖추었습니다. 그러고도 그가 만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자신의 신자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오로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하는 신자와 그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기성 사도들이 훼방을 놓고 옛 동지인 바리사이들이 박해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는 영성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는 그에게 이룩된 방대한 선교 네트워크는 노력만으로 얻어진 결과라기보다는 그의 실력과 노력 그리고 영성에 반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협조 덕분이었다고 할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그가 고백하고 있는 바입니다(1코린 15,10; 2코린 1,12; 로마 15,15-16). 

 

⒌ 예수님께는 이미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불러 무려 3년 동안이나 사도로서 양성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박해자로 기세당당하던 사울을 돌려 세우신 이유는, 열두 사도들은 모조리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큰 그림을 그릴 수 없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적 전망을 열 수 있어 보이는 인물로 박해자 사울을 지목하시고는 그를 돌려 세워 당신의 일꾼으로 키우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이 점을 이렇게 증언해 놓았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 여러 일꾼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렇게 이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⒍ 당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보다 더 번성했던 에페소나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테네 그리고 아테네보다 더 부유했던 코린토 등지에 우상숭배가 만연한 현실을 보고 사도 바오로는 격분하였습니다(에페 5,5; 사도 17,16; 1코린 10,14). 여기서도 나타나듯이, 예수님께서는 예로부터 조상대대로 하느님에 대하여 듣고 배웠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유다인들이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시기도 하셨지만 이들 대다수가 복음을 거부하고 회개를 거절하자, 땅 끝까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비록 우상숭배적인 경향이 농후하지만 이 이방인들을 회개시킬 일꾼이 필요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수메르 문명권의 우상숭배를 피해 가나안으로 왔고, 모세는 동족을 이집트 문명권의 우상숭배를 피해 다시 가나안으로 이끌었습니다. 바오로는 바리사이들이 득세한 이래 편협해져서 우상숭배에 가까워진 히브리 유다이즘을 벗어나서 로마 문명권의 한복판으로 나아갔으며 그 우상숭배로부터도 피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신앙을 로마 문명의 힘으로 보편화시켰습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인한 응답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문명적 차원에서도 다가옵니다. 사도 바오로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순전히 개인적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⒎ 최근에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적 보건위기를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과 같이 전통적으로 선진국으로 행세해 온 나라들이 속수무책으로 위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사실과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그들 선진국들을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 추세가 세계적으로 만연되면서 보건위기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는 무신론과 우상숭배의 영적 바이러스가 보건위기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는 영성위기를 초래하고 있는데도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선진교회들이 속수무책으로 가라앉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복음을 받아들인 미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신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도 무신론과 우상숭배 특히 자본숭배의 풍조는 매우 심각한 지경입니다. 코로나 19 위기 이전부터도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현상이 그 증거입니다. 

정부 당국의 정책 혼선을 가중시키고 있는 원인이 시민의식이 실종되어 버린 사태이고 보면, 이 신앙의 사사화 현상은 책임 없는 자유를 내세우며 방종으로 흐르는 시민들과 이를 공동선에로 이끌지 못하는 정부 당국의 무기력한 대응과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도 우리가 지녀야 할 사명감과 회개의 목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사회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실력을 발휘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있다고 하겠고, 바로 이 점에서도 사도 바오로를 통해서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은 절실하고 절박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룩될 우리 사회의 복음화와 민주화가 또 다른 새로운 한류요 세상의 빛으로서 현 단계 우리 문명을 사랑의 문명으로 진화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류의 선두에 있는 성공적 방역으로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인류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⒏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사회교리로써 사랑의 문명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을 마무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밝힌 바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본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멀리하고 공동의 집인 지구의 생태적 위기를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며 형제애로 가득 찬 문명을 세워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회복하라는 호소요 우리에게 요청되는 회개입니다. 

 

교우 여러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오늘 미사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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