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가정의 성화, 행복의 보루요 성취의 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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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집회 3,2-14; 콜로 3,12-21; 루카 2,22-4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20.12.27.; 이기우 신부

⒈ 오늘 교회가 거행하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우리들의 가정이 이를 본받아 가정의 성화를 이루도록 하는 지향으로 지내는 축일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가정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자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면서 각자가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는 사회적 성취를 위해 준비도 하고 이미 이룬 성취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⒉ 우리들 가정의 성화에 있어서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루신 성가정은 기준이 됩니다. 이 나자렛 성가정을 기준으로 하여 이룩하고자 하는 목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천상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에서 예수, 마리아, 요셉은 하느님을 모시고 자신들의 행복을 누렸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소명을 성취하고 이 행복과 성취를 우리들 모두에게 빛나는 금자탑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교회는 오늘 이 성가정 축일을 통하여 모든 신자 가정들이 이 기준과 목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⒊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를 거치면서 열두 지파 체제가 거의 붕괴되어 버려서, 당시에는 사제직을 수행하던 레위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하고는 거의 혈통을 보전하지 못한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유다 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았고, 마리아 역시 레위 지파에 속한 후손으로서 손색없는 신앙과 율법의 교양을 전수받았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가난해도 신앙만큼은 훌륭해서 하느님 안에 충실했던 아나빔이었다는 뜻입니다. 

 

⒋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로 맺어지기 전에 가정에 대해 지녔던 전통적인 이상은 오늘 집회서의 독서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부로 맺어지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결과이며 특히 부부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는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이 부부를 축복하셨음을 나타내는 산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께 바쳐드려야 할 소중한 선물로 여겼고, 그래서 자녀를 출산하면 가장 먼저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예식을 거행했던 것입니다. 흔히 할례식으로 진행된 이 예식에서 부모는 자녀의 이름을 지어 이웃들에게 알리고, 마을의 어른들과 이웃들은 아기를 축복해 주는 기도를 바치고 부모에게 축하해 주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⒌ 우리는 구약시대에 탁월한 역할을 했던 가모장(家母長)들을 마태오가 가부장적인 특징을 지닌 예수님 족보에 포함시킨 네 가지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유다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은 타마르, 보아즈를 낳은 가나안 여인 라합과 오벳을 낳은 모압 여인 룻, 그리고 솔로몬을 낳은 밧세바입니다(마태 1,3.5-6). 이 네 여인 모두 유다 지파에게서 하마터면 끊어질 뻔 했던 메시아 가문의 혈통을 이어준 역할을 도맡았으며, 인간적 결함이나 위기 상황에서도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축복을 유다 지파에 내려주셨던 하느님의 개입을 믿었다는 점에서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한 마리아의 예표들입니다. 

 

⒍ 구약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 같은 전통은 사도 바오로가 전해준 콜로새서의 말씀에도 나타나 있듯이 신약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가정의 기준이 예수님이 되어서,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이 그러했듯이 신자들의 가정에서 진정한 아버지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가정의 아버지는 하느님을 대행하여 가족을 보호해 주고 하느님을 대리하여 축복해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만이 가장은 아니었으니, 어머니 역시 가모장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보장받았으며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가부장이든 가모장이든 하느님 아버지의 역할을 대행하고 대리하는 신성한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의식이 살아있었고, 그래서 가장의 책임을 맡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자녀들은 공경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부모 공경은 부모가 나이 들었을 때 특히 강조되었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한 효행의 덕을 쌓으면 하느님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⒎ 이렇게 가정이 중요시되었기에, 선교 활동도 가족 단위로 복음을 전했으며 신앙생활도 가족이 함께 가정에서 지켰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유래되어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수된 바, 가정은 축소판 하느님 나라요 가족은 그 나라를 이루는 하느님의 작은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런 정체성을 감안할 때 만일 사도 바오로가 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썼다면, 가족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즉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가족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가족 모두의 마음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순종의 덕목은 특히 가정에서 가족 모두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생활에서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족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될 것이고, 그 말씀이 가족들의 삶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삼종기도에서 나오는 대로 그야말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신비가 현실이 되는 것이지요. 

 

⒏ 오늘 복음 말씀은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하느님께 봉헌한 대목을 전해줍니다. 이 부부는 구약시대에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온 가정의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축복이며 자녀는 그 열매라는 그 전통입니다. 이 전통이야말로 혼인과 가정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이요 계시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대의 많은 가정들에서 이 계획과 계시를 무시하고 인간적인 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에 여러 위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는 일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가장 뚜렷한 징표이며 인간이 존엄한 존재가 되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역할은 가정 이외에 국가나 다른 어떤 사회 단체에서도 감당할 수 없고, 오직 부부의 가정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것입니다. 

 

⒐ 따라서 국가와 사회와 교회는 부부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그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자유를 행사하도록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혼인과 자녀 양육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누리려는 자유과잉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책임 있게 출산하려는 의식과 여성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인식이 커지는 바람직한 현상의 뒷면에는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을 여러 가지 인공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려 드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정을 하느님의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결정판은 부부의 이혼입니다. 이는 부부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결합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며, 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치명적인 불행을 안겨주게 되는 일입니다. 

 

⒑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칠 경제적 능력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사서 바쳤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적 기준으로 보더라도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중산층 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부부에게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나자렛 회당에서도 얼마든지 아기를 봉헌할 수 있었을텐데도 굳이 그 초라한 베들레헴 짐승 우리 동굴에 더 남아있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부들에게 경제적 가치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입니다. 부부의 행복은 결코 그들이 소유한 재산에 있지 않으며 재산이 그들의 행복을 보증해 주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재산 때문에 부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거나 헤어지기까지 하는 경우는 가치가 역전되어 버린 것입니다. 

 

⒒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아기를 안고 들어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뜻밖에도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사람의 노예언자를 만났습니다. 사실은 만났다기보다 기도 중에 성령의 전갈을 받은 이 예언자들이 이미 이 부부가 아기와 함께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한 유다의 노예언자로서 아기에게 닥쳐올 운명까지도 내다보며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 아기가 장차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광이 되리라는 축복의 기도가 그도 역시 메시아를 기다려온 아나빔임을 알게 해 줍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녀들에게 대한 부모의 관심은 세속적인 출세를 보장해 주는 직업이나 재산 여부가 아니라 그 자녀들이 자라서 세상에 기여할 성취여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봉헌할만한 지향이어야 합니다. 

 

⒓ 그런데 시메온은 듣기 좋은 축복의 말씀만 건네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자라서 장차 겪게 될 시련과 또 이 때문에 어머니에 닥칠 불행도 솔직하게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혼인성사의 예식에서도 주례사제는 신랑과 신부에게 세 가지의 다짐을 받는 가운데, 일생 동안 즉 다시 말해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서로 사랑하며 존경할 것인지를 공개적으로 묻습니다. 기쁨과 슬픔,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 이 모두가 하느님께 우리네 삶에 허락하신 인생의 필수 요소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정은 우리가 태어나 행복을 누리는 보루이며 사회의 기본 세포이고 인생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성가정을 이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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