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심판의 영성과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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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심판의 영성과 내공

-종말과 심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실천

에제 34,11-17; 1코린 15,20-28; 마태 25,31-46
그리스도왕 대축일; 2020.11.22.;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로써 올해의 전례력이 마무리되는데, 교회의 전례력은 고유시기와 연중시기로 구분됩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따라서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시기로 진행되는 고유시기는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관상하게 하는 때이고, 연중시기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이끌어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처럼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때입니다. 

   이 고유시기 동안 전례에서 우리가 관상하는 예수님 일생의 각 단계들은 우리가 신앙고백문에서 고백하는 신앙의 신비들을 반영합니다. 즉,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대림과 성탄시기 전례에서 기념합니다. 둘째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음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사순시기 전례에서 기념합니다. 셋째로,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과 하늘에 올라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심과 성령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부활시기 전례로 기념합니다. 

 

⒉ 그런데 부활시기의 전례를 살펴보면 부활대축일로 시작되어 승천대축일을 거쳐 성령강림대축일로 마무리됩니다. 신앙고백 안에서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은 전례로 기념하지만 하늘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는다는 고백을 전례로 기념하는 순서가 빠져있습니다. 다른 신앙고백 조항들이 전례로 기념되고 있는 이치를 적용하자면 ‘심판대축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심판은 경축의 대상이 아니라는 정서적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전례력에서는 이 심판대축일을 부활시기에 넣지 않고, 연중시기의 맨 마지막 주일인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또 이 시기가 위령성월과 겹치기 때문에 반성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수월한 측면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치상으로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은 심판에 대해 묵상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⒊ 이 말씀은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편집한 종말설교에 속합니다. 진복팔단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가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를 우리네 현실에서 창조하심을 알린다면, 종말설교는 심판을 의식하고 준비시키심으로써 그 나라를 완성하심을 알려줍니다. 행복으로 당신 나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심판으로 그 나라를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에 대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지만, 그 사랑을 거절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베푼 그 사랑을 바로 당신께 베풀어드린 것으로 간주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신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도록 재촉하는 잣대이며 인생의 기준이자 역사의 목표입니다. 

 

⒋ 이 기준과 목표를 통하여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개인의 일생도, 인류의 역사도,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개별 문명들도 모두 이 기준과 목표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준과 목표를 자신의 인생에서도 기준이요 목표로 받아들이면 그 삶은 다시 태어난 삶, 즉 부활의 삶이 됩니다. 기준과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룩하는 인생과 역사는 이미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보여주셨고 가르치셨으며 당부하신 최고선의 가치로 채워질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최고선의 가치에 배치되는 죄와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 밀려납니다. 흔히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에 물들고 나중에는 죄인 줄도 모르고 태연하게 죄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면 죄 대신에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이것이 심판의 영향력이 작동하여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으로 부활시키는 원리입니다. 

 

⒌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받은 이 계시의 말씀에 따라서, 세상의 끝 날이 종말이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됨으로써 그야말로 부활한 삶을 살게 되는 때가 바로 종말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⒍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 심판의 영성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자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⒎ 여기서 목자는 양치기가 아니라 양 떼를 돌보고 이끄는 지도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양 떼는 신자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며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보면 세상의 구원에 대해 책임과 소명을 부여받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그저 자기자신과 자기 가족만 챙기며 살아가는 소시민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세적인 이익과 쾌락에만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속물들과도 다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다스리고, 자신의 가정과 인간관계를 가꾸며, 자신의 직업성소를 발휘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일이 지도자로서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길이며 이것이 심판을 기다리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지도자적 소명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이룩해야 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오늘 미사의 감사송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⒏ 세상에는 세 가지 심판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심판의 현실입니다. 즉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며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무법천지에서는 사람들이 무척 힘들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무심판의 현실을 혐오합니다. 그래서 악한 자가 처벌을 받고 정의가 구현되는 율법적인 심판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 두 번째의 율법적인 심판이 세상에서 법에 의한 지배, 즉 법치주의적 현실을 실현시켰습니다. 법 앞에는 누구나 평등하며 법은 양심과 도덕의 최소한으로서 각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무법적 상황으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만일 누군가가 법을 어기고 남을 괴롭히면 법을 위반한 행위의 경중에 따라서 벌을 받습니다. 

 

⒐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은 엄연히 살아있었지만 본래의 제정 취지대로 사람들을 죄악으로부터 보호하고 하느님께로 이끌기 보다는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소외시키는 악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로서 선행만을 실천하신 예수님께 대해서조차도 신성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웠으며, 이 종교적 혐의로는 사형을 시킬 수 없으니까, 사형집행권이 있는 빌라도 총독으로 하여금 정치반란죄로 몰아서 십자가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법의 정신은 명목뿐이고 정작 처벌받아야 할 범법자들은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고 억울한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만큼 법률에 의한 심판의 질서는 허술한 현실입니다. 

 

⒑ 그래서도 요청되는 것이 사랑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처벌로써가 아니라 자비로써 스스로 노력하게 하여 완성시키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부활하시어 예루살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나(요한 복음 20,19-23),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나타나신(요한 21,15-19)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가 바로 심판인데, 여기서 그분은 배반하여 당신에게서 도망쳤거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죄를 뻔히 아시면서도 문책하기보다 성령을 보내주시거나 예전보다 더한 신임을 보여주심으로써 스스로 회개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이후 베드로와 그 동료 제자들은 용감한 사도가 되어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끝내 목숨까지 바쳐 순교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심판은 그들의 삶을 완성에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심판에 대해서 그분의 자비를 배우는 성숙한 영성이 필요하고, 또 심판의 영성이 가져다주는 천국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예수님처럼 인내롭게 자비를 베푸는 내공도 요청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들은 이 사랑의 심판이라는 관점과 차원에서 들려오는 진리입니다. 무법천지에서 벌어지는 무심판의 현실이나 사랑과 자비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율법적 심판의 차원에서 알아들을 말씀이 아닌 겁니다. 

 

⒒ 따라서 심판이 우리를 완성에로 이끄는 하느님의 자비인 이상, 천국도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비록 갈등도 있고 번뇌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치열하게 사랑을 행하는 삶의 현실이 바로 천국이요 부활입니다. ‘영원한 불’로 상징되는 지옥은 바로 이 사랑을 거절하고 오로지 자기자신만 아끼는 기형적이고 괴물 같은 삶의 현실이어서, 도무지 하느님의 사랑이 주는 기쁨과 평화가 자리 잡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삶이야말로 부활한 삶으로서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완성시키는 은총입니다. 천국을 향한 심판의 영성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내공으로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뜻깊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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