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가난한 이들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685

본문

“가난한 이들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집회 7,32)
-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풀이

연중 제33주일; 2020.11.15.;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당신의 사명임을 공생활 시작부터 천명하셨으며(루카 4,18), 실제로 공생활 내내 그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루카 6,20). 굶주리던 그 가난한 이들과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시고(루카 7,34), 세상일에 고달퍼 슬피 울던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기도 하셨습니다(루카 16,25). 눈이 멀었거나 손이 오그라들었거나 다리가 오그라든 가난한 이들을 고쳐주셨고(루카 7,21; 6,8; 요한 5,8), 중풍이나 나병으로 소외되었던 가난한 이들은 마음까지 고쳐주셨습니다(루카 5,24; 5,13). 그리고 그들이 마귀 들려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마귀를 내쫓아주심으로써 제 정신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루카 4,35; 8,2; 8,38). 

 

⒉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권한과 사명을 주셨습니다(루카 9,1). 치유와 구마의 사도직 활동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느라고 모욕도 당하시고 중상모략도 겪으셨습니다.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아냥을 들으시기도 했고(루카 7,34),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옭조여 있는 중풍병자의 마음을 헤아리신 예수님께서 그의 죄부터 용서해 주시자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시기도 하셨습니다(루카 5,21). 심지어 바리사이들은 마귀들을 내쫓아주시던 예수님을 보고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그리하는 것이라는 누명과 모함을 그분께 뒤집어씌우기도 했습니다(루카 11,15). 이것이 공생활에서 짊어지셔야 했던 그분의 십자가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려면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당부하시며 당신이 함께 하시겠다고 격려하셨습니다(루카 9,23). 그리고 이렇게 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선행과 희생과 사랑이야말로 바로 당신께 해 드린 것으로 간주하여 최후의 날에 심판하시겠다고 못 박듯이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40). 이리하여 가난한 이들에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⒊ 올해 가난한 이의 날을 위한 담화의 주제가 들어 있는 집회서의 말씀(7,29-36)이 알려주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이루는 연대는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예배를 드리려면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축복을 합당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봉사가 함께 이루어질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우리가 청하는 기도의 지향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흔히, 사회경제적인 곤경과 정치적인 소외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도우려면 침묵으로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을 듣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가야 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어야 하며,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하여 그들과 지속적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곤경과 소외를 돕는 일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영적 빈곤을 돕기 위해 그들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또 할 수 있고 또 그들이 동의한다면 우리의 공동체에도 초대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위한 해결사가 되어 준다기보다는 그들의 편이 되어 주고자 손을 뻗으시는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⒋ 손길을 뻗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 안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미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는 수많은 손길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고문피해자, 해고노동자, 감정노동자 그리고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치유할 기회를 제공하며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전 세계를 고통과 죽음, 절망과 혼돈에 빠트린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린 최근 몇 달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도움의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까! 올바른 치료법을 찾고자 애쓰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피는 의사들이 내민 손길, 근무 시간을 초과하여 환자들 곁을 지키며 돌보는 간호사들이 내민 손길, 가능한 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행정가들이 내민 손길, 사람들과 접촉하는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수많은 긴급한 요구에 응답하는 약사들이 내민 손길, 안타까운 마음으로 강복하는 사제들이 내민 손길,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집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이 내민 손길, 기본 서비스 제공과 보안을 위하여 일하는 이들이 내민 손길, 이러한 도움의 손길들은 감염과 두려움에 맞서 도움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우리 한가운데에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합니다. 우리 사회에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지만,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습니다.  

 

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기는 많은 확신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유의 제약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사랑하는 이들과 예전이라면 평소에 늘 만나던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들을 불현듯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하여 의문이 들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집 안의 침묵 속에 머물면서 소박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돕고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제애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 있음을 다시 깨달을” 좋은 때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윤리, 선, 신앙, 정직을 비웃으며 도덕적 타락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 사회생활의 기초가 무너지면, 인간이 개인적 이익을 지키려고 서로 다투게 되고,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잔인함이 발생하며, 환경 보호를 위한 참다운 문화의 증진이 저해됩니다”(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29항). 요약하자면, 우리가 각자 이웃과 모든 사람을 향하여 느껴야 하는 책임감을 일깨우지 않는 한, 경제와 금융과 정치의 심각한 위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하는 이 말씀은, 자신이 공동의 숙명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저마다 지닌 책임감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약한 이들의 짐을 짊어지라는 권고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일치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5,13-14; 6,2).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자유는 다른 이들,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우리의 책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⒍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집회 7,36). 집회서 7장은 이 표현으로 묵상을 마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위령성월에 걸맞는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언제나 우리 삶의 마지막 때를 유념할 필요가 있음을 드러내 주는 해석입니다. 우리의 공동 숙명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보다 가난하고 우리와 동일한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우리 각자가 지향하는 목적 또는 목표를 강조합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 삶의 목적을 위해서는 계획의 실현과 여정의 부단한 완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목적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여정의 최종 목표이고, 그 무엇도 우리를 이 목표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랑은 나눔이고 헌신이며 봉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고 사랑으로 깨어났다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미소를 마주하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그 순간, 바로 우리 삶의 이 목적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미소도 사랑의 원천이 되어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처럼, 가난한 이에게 뻗은 손길은, 그리스도 제자로 살아가는 오직 그 기쁨으로 소리 없이 겸손하게 도움을 주는 이들의 미소로 언제나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⒎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가난한 이들과 만나는 이 여정에서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천주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십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소외받는 이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마구간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셨을 정도로 가난하셨던 데다가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 동정의 몸으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위협 때문에,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 배필이신 요셉과 어린 예수님과 함께 다른 나라로 피신해 가셔서 여러 해 동안 난민으로 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이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봉사하는 모든 이가 하나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하여, 가난한 이에게 뻗은 손길이 나눔과 되찾은 형제애로 감싸 안는 품이 되기를 바랍니다. 

 

⒏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우리에게도 어머니로 모시라고 내어주셨기 때문에 ‘자모(慈母)신 마리아’로 부르며 공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경은 모든 성인들 가운데 그분을 으뜸으로 공경하는 상경지례(上敬之禮)입니다. 그리고 이는 마리아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처럼, 교회도 모든 이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가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우리 교회도 ‘자모(慈母)신 성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모이신 성교회의 품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안식을 누리고 위기에 내몰린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공로를 쌓음으로써 이 세상에서부터 자비를 베푸는  참된 행복을 누리다가 마지막 심판에서 영원한 천상 행복의 상급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