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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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

  • 교회 쇄신을 위해 평신도 부부, 여성 수도자, 신학자 사제가 토로한 쓴 소리 ⓶ 

지혜 6,12-16; 1테살 4,13-18; 마태 25,1-13

연중 제32주일; 2020.11.8.; 이기우 신부

⒈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고 평신도 주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의 사도적 지위를 격상시킴에 따라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이와 관련된 성직자 및 수도자와의 관계 등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만, 1968년부터 지금까지 반 세기 이상이나 이 평신도의 날을 지내고 있지만 아직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그 소명과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성직자와 수도자의 소명과 역할도 이에 발맞추어주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게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평신도 사도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평신도만이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하여 교회 전체가 쇄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얼마나 또 어떻게 쇄신되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일반 국민이 바라보는 가톨릭 교회의 모습일 것인데,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2019년에 조사한 내용을 주교회의 산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가 <한국천주교회 20220>에 발표한 내용 중 주요한 두 가지 지표만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이에 따르면 종교호감도가 불교는 26%, 개신교는 20%, 천주교는 11%입니다. ‘호감이 가는 종교가 없다’는 응답도 43%에 이릅니다. 그리고 주관식 설문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응답한 내용은 교회쇄신과 복음적 성장을 위해 ‘사목자들의 권위주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바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표현대로, 슬기로운 이들이라면 거울에 비친 이런 모습을 보고 쇄신의 노력을 기울이려 할 것이요, 어리석은 이들이라면 그런 노력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거울을 보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를 향해 던지는 쓴 소리들을 모아서 간추려 보았습니다. 

 

⒉ 먼저 윤 프란치스코와 권 수산나 부부의 목소리로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발간하는 강론길잡이 <선포와 봉사> 중에서 2020년 가해에 나온 글 중 132권에 게재된 글을 소개합니다. 

“저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조그마한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자랑스럽기도 했고 혹은 실망과 좌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 사회 내에서 교회의 존재조차 희미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특히 코로나 19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늘 현장을 찾아다니며 쉬운 비유로 설명하시고 작은 이들을 도우셨습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은 현장감이 너무 없으며 도식적이고 의례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신부님들에게 강론을 위해 고민하고 삶에 필요한 방안을 신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3) 교회 방송과 신문 등 언론을 획기적으로 개혁하여 사회 공동체를 위한 도구로 활용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언론은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그저 소모품, 장식에 불과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인건비를 지급하고 건물과 장비를 유지합니다. 구독율, 청취율 모두 최악입니다. 신자들조차 잘 보지 않습니다. 보고, 듣고, 읽어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가 목적이라 해도 실패한 것입니다. 다른 종교 방송과 비교해도 참으로 부끄럽고 마음이 아픈 상황입니다. 

4) 교회 공동체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청소년을 포함한 성인들의 교육 교재로 새로이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 부부가 대학을 다니던 청년 시절의 교회는 그 순교자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한국 사회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을 가졌었습니다. 

5) 교회 조직 운영이 너무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며 비효율적입니다. 교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많은 법과 제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앙인으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 교회 공동체는 너무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며 억압적입니다. 조직 관리 수단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순종하며 본당 공동체 구성원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합니다.

6) 사제들의 삶이 신앙 공동체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절제와 검소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방부제가 되었습니다. 

이상 40여 년간 저희가 보고 느꼈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드렸습니다.” 

 

⒊ 다음에는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인데, 소속을 알 수 없는 어느 수도자의 실명(이인선 수녀) 기고입니다.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귀·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번 담가 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 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해외성지 순례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 문장에 쓰인 멋스런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그리고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 값이라도 깍아 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 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았거나 남편과 자식 때문에 속 썩어보았거나 시댁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본당·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회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⒋ 마지막으로 신학자였던 사제(이제민 신부)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공개한 글입니다(2011.3). 이 글에서 그는 1997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신학교 교수직을 떠난 소회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교황청과 주교단에 대한 쓴 소리만 인용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방과 대화, 자기 쇄신을 제창하면서 보수적인 세력과 온갖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거의 100년 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구태의연한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개방과 쇄신을 교회성의 상실과 교회의 세속화로 보고 이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강경한 보수의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도 공의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다. 쇄신과 개방과 대화를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가르침과 다르다 하여 남을 이단으로 ‘단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죄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겉으로는 제도 교회,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가톨릭교회를 이끌어온 것 같아도 - 만일 그것이 교회의 전부였다면 이미 벌써 오래 전에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 교회는 성령의 교회로서 가톨릭 교회였기에 오늘날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다. 가톨릭은 지금 우리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주교들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을 교회 자체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하며 참아내지 못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들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에 대해 공세적이고 불쾌하게 생각하기 전에 “자신은 지금 교회인가?” 스스로 물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판을 가하는 그들의 사제들도, 그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평신도들도 모두 그대로 교회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공의회의 정신이다. 권위는 이 경청에서도 나온다. 우리 ‘아래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교회를 읽듯이 그들도 우리 사제들을, 그리고 평신도들을 교회 대하듯 해야 한다. 베드로의 교회가 하느님 백성적이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베드로적이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이다. 당신들이 교회이듯이 사제도 교회이며 평신도들도 교회이다.” 

 

⒌ 이상 인용해 드린 쓴 소리에 대하여 모든 내용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공감할 수는 있습니다. 그 공감의 넓이와 깊이가 넓고 깊을수록 교회는 커다란 자기복원력으로 역사 안에서 쇄신의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평신도 주일에, 평신도 사도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성직자와 수도자 모두가 함께 복음적으로 쇄신해 나가야 함을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평신도들이 본당에서 성사생활을 하면서도 사도직 활동은 가정이나 사회라는 평신도 본연의 장에서 전개하려 들 것이라는 전망을 조심스럽게 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서야말로 평신도의 주도권이 온전히 보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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