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아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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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아리랑 이야기
용서한다는 것, 정체성과 관계성의 회복: 한(恨)의 신학, 해원(解冤)의 사도직

집회 27,30-28,7; 로마 14,7-9; 마태 18,21-35
연중 제24주일; 2020.9.13.; 이기우 신부

⒈ 연중 제24주일인 오늘, 우리는 첫째 독서와 복음에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회서에서는 이웃이 저지른 불의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지만, 복음에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독서는 불의한 행위에 대한 용서를 가르치셨지만, 복음에서는 불의를 저지른 횟수에 따른 용서가 문제가 아닐 정도로 행위 차원의 용서를 훨씬 더 넘어서서 아주 근본적인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행위로만 두고 따지자면 어느 누구도 일흔일곱 번씩이나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존적인 차원의 용서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불의한 행위를 저지른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여줌으로써 더 이상 불의한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악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용서는 받아들여주는 일이요,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더 큰 일입니다. 

 

⒉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 상호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시간의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 상호 간에는 크로노스라고 해서 양적인 시간이 작용합니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오지 않지요. 반복되는 경우도 없습니다. 매 번, 매사, 모든 사람이 각기 다 고유합니다. 각기 나름의 배경이 다르고, 이유가 다르며, 의미와 영향도 다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작동하는 시간은 카이로스라고 해서 질적인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살아있게 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모든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보내신 생애는 전체가 카이로스이며, 그 중에서도 공생활 3년은 카이로스 중의 카이로스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에 나오는 용서와 복음에 나오는 용서가 서로 다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⒊ 카이로스적인 차원에서 보면, 용서는 죄를 지은 행위에 대해 단죄하고 이에 해당되는 벌을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죄를 행하지 못하도록 상대방을 죄를 짓게 하는 악으로부터 떼어놓고 우리 편에로 받아들여 끌어안는 수락 현상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누군가의 죄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소외를 당하게 되고 이 소외감은 상처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소외시키는 행위가 구조화되게 되면 상처가 깊어져서 한(恨)으로 남게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유난히 많은 화병은 사회적 상황의 소외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 특히 가족관계의 스트레스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이 질병으로까지 나타나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민간 신앙에서 무당이 해야 했던 주된 역할은 바로 한이 맺힌 민중의 원한을 씻어 주고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씻김굿 또는 해원(解冤)굿이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한을 들어주고, 영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한 맺힌 이들의 응어리를 쏟아내게 만들어서 다시금 본래의 공동체로 돌려보내주는 사회통합 역할이 무속이 발휘했던 종교적이면서 사회적인 기능이었습니다. 민중의 한은 지배층의 잘못된 정치로 인한 희생과 지식층의 지식독점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무시와 억압 또는 고리타분하고 비합리적인 유교 문화에서 기인한 가족관계의 폐습 그리고 각자가 존엄한 존재인 사람들을 억지로 신분으로 구분해 놓고서는 이로 인한 차별을 자행함으로써 이로 인해 당하는 부당한 억압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판소리, 민요, 시나 소설 등으로 민중의 한을 표현하여 자칫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한이 없는 민족은 없겠지만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온 민족은 아마 드물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리랑 노래입니다. 전국 각 지방마다 고유한 아리랑 노래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⒋ 여기서 이 한(恨)이 왜 이렇게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우리 민족의 정서 속으로 들어왔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악이 선을 누르고 간섭하며 지배하는 이치를 생각해 놓은 프란츠 파농의 수직-수평 폭력 이론을 참조하면, 우리 민족을 외세가 사상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지배하면서 수직 폭력이 구조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민족 사회 내부 안에서도 수평 폭력이 자리를 잡으면서 조금이라도 힘의 우위가 있는 자들이 약한 이들을 억누르려는 갑질 풍조가 팽배해지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작용할 때 한의 정서가 민족의 정신적 유전자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⒌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의 명나라를 섬기던 나라였습니다. 신하들 사이에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사조가 얼마나 뿌리 깊었든지 조선의 임금인 세종이 백성들의 문맹을 깨우쳐 주려고 어렵사리 창제한 한글도 양반들의 지식 독점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를 극심하게 받아 백성들에게 퍼지기 어려웠고, 나라의 공식 문서에 사용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자주국방은 꿈도 꾸지 못해서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정도였고, 그나마 바다에서 이순신이 활약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조선은 16세기에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지도 모릅니다. 

중국의 지배권이 명 왕조에서 청 왕조로 바뀐 후에도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명 왕조에 대한 충성을 고집하다가 병자호란을 당했고, 그 후에는 다시 청 왕조의 속국처럼 매사에 간섭을 받는 신세로 살다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예 조선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그야말로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층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까막눈이었고 그 사회적 책임을 질 줄도 몰랐던 불한당이었습니다. 조선의 선비 문화의 그늘입니다. 

 

⒍ 그 이후 지난 백 년 동안의 이 나라의 수직적 지배권은 일본이 식민통치를 하며 행사하다가, 해방 직후부터는 일본을 패망시킨 미국이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군사작전지휘권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국토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주권이 군사작전권인데, 이 권한이 우리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한테 있지 않고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수직적 지배구조 아래에서 이 나라의 엘리트들과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자들은 국민을 섬기기보다는 미국을 섬기면서 자신들과 자식들의 출세와 호의호식을 누리려고 온갖 갑질을 부리는 통에 사회의 부와 권력은 사회적 의무를 수반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 Obligée)’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법률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배제되어 온 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받으면서 구조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한 많은 정서가 작동합니다. 

 

⒎ 이런 상황에서 개별적인 불의한 행위들에 대해서 용서하라는 메시지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구조적 악의 배경을 밝혀내지 않고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더더욱 설득력이 없지요. 그래서 민중의 한을 무한대로 유발해 내고 있는 이 한의 지도를 역사적으로 규명해서 도대체 어떤 악이 우리 사회와 민족을 억누르고 있는지를 알아서 몰아내야 하고, 정말로 필요한 공동선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구조적인 악에 기반한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을 회심하게 만들어 놓은 연후에라야, 그런데 만약 그들이 회개를 거절하거나 마냥 미룬다면, 그래도 그들이 어떠한 악의 구조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진상만큼은 규명해 놓아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질서 위에서 정말 필요한 공동선의 구조를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를 이웃이요 형제요 동포로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가한 정신적인 빚을 청산하기 이전에 하느님께 대해서 갚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빚을 청산해야 하는 것이지요. 노력 없이 받아서 누리던 기득권이라면 당연히 사회적 의무가 따르는 법인데도 그 의무를 미루어왔다면 당연히 이는 빚이요 부채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⒏ 조선 왕조가 기울어져 가는 명운 속에서도 마지막으로 조정이 총력을 기울여서 없애고자 했던 것이 천주교였습니다. 마치 천주교 때문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무려 백 년 동안 가했던 이 박해 속에서 짐승처럼 고문당하고 억울하게 숨져간 천주교 교우들은 거의 만여 명에 이릅니다. 이 치명자들은 대부분 자세한 기록도 없이 희생되셨기 때문에 시복 시성의 절차를 밟을 수도 없지만, 그분들의 자발적 희생의 의미는 이 민족의 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만큼 크고 고귀합니다. 게다가 맡겨진 교우들을 위하여 김대건 안드레아는 목숨을 바치고 최양업 토마스는 일생을 바치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으로서 크고 환한 등불을 쳐 들어 올렸습니다.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섬김인지를 두 사제는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줌으로써 다시는 악에 물들지 않게 하는 길을, 그래서 미리 용서함으로써 회개에 초대하는 길을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교우촌의 치명자들이 우리 민족 앞에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들이 개척해 놓은 섬김의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에 우리 주변 민족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부당하고 불의한 악을 우리는 결단코 흉내내지 않으면서 이 나라를 명품 국가로 만들어나가는 일을 계속하면서도 그들 나라들과 도울 일은 확실하게 돕는 이 길을 계속해서 가면 됩니다. 백 년 전의 과거처럼 주변 강대국들이 함부로 흔들 수 있는 약소국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오히려 부러워하는 선진 국가임을 증거하면 됩니다. 

단,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폭력인지, 무엇이 우리를 선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서 제대로 알아야 하고 또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부당하게 지배했던 중국인들, 불의하게 침략하고 식민통치를 했던 일본인들, 함부로 한 나라를 두 동강 내고 서로 미워하게 만든 미국인들과 러시아인들, 그리고 소련 무기를 빌려다가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북한 공산당과 인민군들, 이 모든 이들이 무엇이 옳은지, 얼마나 한국인들이 선한지, 그러면서도 강한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우리의 정체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관계성까지도 한층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며 또한 사랑의 실현이라는 진리가 이 한반도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는 정체성과 관계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도직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한을 풀고 동방의 빛이 되게 할 용서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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