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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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순교자들을 배출한 신앙의 터전, 교우촌 ⓵ 김대건과 최양업

 

2역대 24,18-22; 로마 5,1-5; 마태 10,17-22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020.7.5.; 이기우 신부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이문근 신부가 곡을 쓰고 최민순 신부가 가사를 붙인 287번 성가(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노래)에는 젊은 나이에 치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한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가 한 편의 시로 녹아 있습니다.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이렇게 시작되는 1절은 전반적으로 복음 진리가 들어오기까지의 정신적 상황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서라벌 옛 터전’은 한반도, ‘연꽃’은 불교, ‘선비네 흰 옷자락’은 유교, ‘무궁화’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천주교를 각각 상징합니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과 진리를 섬기는 높은 정신풍토가 조성되어 있다가 통일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는 불교가, 조선의 시대에는 유교가 우리 민족의 대표적 되는 종교로서 정신의 표현양식으로서 이끌어 주었는데, 연꽃이 이울고 선비네 흰 옷자락이 어둠에 짙어가듯이 기울었을 무렵 천주교가 이끌어 줄 진리의 빛으로서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선 후기에는 억눌리고 쌓인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여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동요하던 민심이 이반되던 그 시절에 참된 진리를 목말라 하던 선비들은 천주교를 들여와 진리의 빛을 겨레에게 비추임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고, 김대건 신부는 그 서광과 기대를 한 몸에 담뿍 안고서 피어난 존재였습니다.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 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이렇게 이어지는 2절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마카오에 세운 신학교에서 김대건 신부가 어렵사리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의 길을 준비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는 이 땅의 역사에서 서양 학문을 처음으로 배운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도무지 어두웠던 조선 사회는 진리는 물론 인재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실학을 연구하다가 서학에서 진리를 찾은 선비들이 복음을 들여온 길이 동지사 길이었는데, 동지사란 해마다 동지날 전후해서 한양과 연경 사이를 왕래하던 사신이었습니다. 장춘에서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도 이 길을 통해 일시귀국할 수 있었으나 외국 선교사들을 동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는 외국인들에게는 국경을 닫아 걸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조선의 국운이 트일 수도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해지는 만리장성 돌베개 삼아 자고 숭가리 언저리에 고달픈 몸이어도 황해의 노도엔들 꺾일 줄 있을소냐 장한쏜 그 뜻이야 싱싱히 살았어라  

계속되는 3절은 선교사의 입국통로를 개척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만주를 통해 압록강물이 얼어붙는 한겨울에 입국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만리장성이 보이는 만주 벌판이나 송화강 언저리에서 고달프게 방황해야 했다가, 그 다음번에는 바다를 통해 입국을 시도하여 가까스로 성공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나서는 허술한 돛단배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에서부터 황해를 통해 표류하며 제주도 용수에 표착했다가 충청도 나바위에 극적으로 입국한 사연을 노래했습니다. 이때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강수 굽이굽이 노돌이 복되도다 열두 칼 서슬 아래 조찰히 흘리신 피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4절은 치명하던 장면을 그렸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계시던 경기도 은이 공소에서 첫 미사를 드리고 6개월 가량 숨은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하는 등 짧은 사제생활과 사목활동을 하던 중, 조선에 선교하러 파견되는 후속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확보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황해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6개월 가량 문초를 받고 회유와 고문을 당한 후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백사장이었던 새남터의  건너편이 노량진인데, 그 옛 지명이 노돌이입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를 참수하던 당시 휘광이들은 일부러 잘 갈아놓지 않은 무딘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열두 번째에 가서야 목이 잘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조정의 박해가 잔인했는지 그리고 김 신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요?  

 

가신 님 자국자국 남긴 피 뒤를 따라 싸우며 끊임없이 이기며 가오리니 김대건 수선탁덕 양떼를 돌보소서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5절은 김대건 신부의 영웅적인 순교에 힘을 얻은 후대의 교우들이 조국의 복음화에 힘써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수선탁덕이란 첫 번째 사제를 뜻하는 옛말인데, 천상에 계신 김대건 수선탁덕께 전구를 청하여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펴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사실상 우리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박해를 이긴 신앙을 첫 번째 밑거름으로 삼고, 식민통치에 항거하던 독립운동의 의기를 두 번째 밑거름으로 삼으며, 해방 후 분단 상태에서 들이닥친 독재에 맞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양심을 세 번째 밑거름으로 삼아서,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이 화해한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복음의 진리를 꽃 피우자는 다짐입니다. 

 

⒍ 어린 나이에 소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신학교에서 십 년 동안 준비한 끝에 1845년에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숨어 지내는 교우들을 찾아 사목하기도 하고, 선교사를 안내할 뱃길을 개척하려다가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에 반역죄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아 새남터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사제가 된 지 불과 일 년 만에 치명한 셈입니다. 그 후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7월 5일은 그분이 복자품에 오른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축일로 정해진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에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고, 무명의 치명자들만 해도 만 여명을 헤아릴 정도이며, 기록이 확인되어 시복 시성되신 순교자들만 해도 124위와 103위에 이르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 순교자들의 대표격으로서 자랑스런 표상입니다만, 그래서도 이 축일에 그분만을 기릴 수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1925년에 복자품에 함께 오른 순교자들만 해도 78위가 더 계시고 1984년에 성인품에 함께 오른 순교자들은 102위가 더 계시기도 한데다가, 사실 김대건 신부가 이러한 삶을 살아오시기까지 목숨을 걸고 밑거름이 되어 주신 인물들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⒎ 먼저 성소의 은인들부터 살펴보자면, 모방 신부는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소년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발탁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사제품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남기신 25통의 서한들 중 대부분은 마카오와 페낭 신학교에서 신학과 언어와 학문을 가르쳐주신 교수 신부들에게 존경의 안부를 전하는 한편 선교활동을 보고하느라 보낸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신앙의 내력을 살펴보면,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충청도에서 4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가문이었고, 그 증조부되는 김진후 비오가 최양업 신부의 가문과 더불어 내포의 사도로 불라우는 이존창 루도비꼬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이존창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를 연구하던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으므로, 김대건 신부의 신앙은 초기 신앙 선조들에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⒏ 이러한 사정은 최양업 신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박해시대에 교우촌에서 태어나 신앙을 배우고 마카오로 가서 사제가 되기 위해 동문수학했던 이 두 사제는 그 생애와 신앙이 거의 그대로 겹칩니다. 그러니까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의 신앙은 초기 신앙 선조들이 복음의 진리를 들여온 노력을 한 뿌리에서 맺은 열매라면, 이 두 분의 사제직은 신앙의 불모지 아시아에서 방인 사제 양성을 목표로 설립되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노력을 또 다른 한 뿌리로 해서 맺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 모두를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라고 함께 인정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래서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이 두 신부의 서한을 함께 소개, 번역한 서한집의 제목이,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입니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순교함으로써 신앙의 주춧돌을 놓았고, 최양업 신부는 순교하는 대신 김 신부가 떠난 조선 팔도를 두루 다니며 12년 동안 수많은 교우촌을 사목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⒐ 오늘이 1925년에 시복된 79위 순교복자들을 대표하여 제정된 축일이기도 하지만,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모두 시복 시성되신 오늘날에 와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복시성되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까지를 모두 대표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순교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신앙의 터전은 교우촌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도 교우촌 출신이지만, 당시 박해받던 교우촌에서 교우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증거한 대변자는 최양업 신부입니다. 김대건 신부처럼 순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이름이 그늘에 가리어져서는 안 됩니다. 어찌 보면 순교의 길보다 더 험난한 사목의 길을 최양업 신부는 걸었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12 년 동안 교우촌 등지를 돌아다니던 발길에 담긴 마음 속에는 동기였던 김대건 신부가 젊은 나이로 치명하는 바람에 못 다한 사목과 선교의 열정이 가득 담겨있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몫까지 다 하느라고 두 배로 더 힘든 길을 걸어가고자 했었을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천주가사에 주요 교리를 담아서 교우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신앙을 토착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교부 역할까지 해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6년 4월에 최양업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는데, 이로써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그도 김대건 신부와 같이 복자와 성인 대열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⒒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이 축일에 수선탁덕이시오 피의 순교자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뿐만 아니라 사실상 최초의 사목자요 땀의 순교자로서 가경자가 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도 이 땅에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으로서 함께 기리면서 두 분 사제에게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전구를 청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초기 신앙 선조들을 비롯하여 순교자들과 교우촌 신자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조국 복음화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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