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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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거룩한 변화를 위한 실천 ⓻ 성체 신심

신명 8,2-16; 1코린 10,16-17; 요한 6,51-58
성체 성혈 대축일; 2020.6.14.; 이기우 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과 삼위일체를 경축하는 대축일과 예수 성심 대축일 사이에 배치된 이 전례는 그 배치 순서가 말해주듯이, 가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강림하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세상에 삼위로 일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가 바로 자신과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성사적 변화를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예수 성심을 살아가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하나 : 브루노는 화형당하고, 루터는 뛰쳐나가고…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의 기점은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2003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반포한 회칙이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인데, 성체성사 신학을 담고 있는 이 문서에서도 이 공의회가 이 성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성체와 성혈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표명했는데, 이는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계시적 언급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놓은 성전 즉 거룩한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중세 유럽의 철학적 사유로 엄정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개입 없이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변화에 대한 이 세 가지 형용부사, 즉 거룩한 변화가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라는 트리엔트식 표명에 대하여 중세에 특유한 형이상학적 용어로 아무리 자상하게 설명한다 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성서적 형용부사 이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실체적 변화’에 대하여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으로까지 과도하게 성체성사의 거룩함을 가르쳤던 당시 교회의 ‘무지한’ 관행에 반발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 브루노(1548-1600)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인용하여 모든 물질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성체성사 중에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가 아니라 마법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브루노의 이 같은 주장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당시 교회 교도권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성체성사의 신학적 본질에 비추어 보면 역시 초점이 빗나간 반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교권 당국은 끔찍하게도 그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위기의 일단을 잘 말해줍니다.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브루노를 화형시킨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9년에 브루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는 재심 판결을 내렸고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하였습니다. 성체성사의 충분조건인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황청 관료들의 부패와 과도한 모금 행위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에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이 항의에 대해 레오 10세 교황은 파문으로 응수했고 결국 이 파문장을 찢어버린 루터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의 효력 모두를 폐기한 채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가톨릭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직무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것인데, 과도한 모금 행위와 이로 말미암은 부패상은 파스카의 역사적 정신에 대한 섬김과 함께 상호 섬김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人效的으로 – 事效的으로가 아니라 -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항의는 정당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종교적 관용으로 수용하고 부패상과 과도한 모금 행위를 중단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문으로 응수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서방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루터와 그에 동조한 개혁가들이 세운 공동체들 역시 성사적 효력 자체를 부인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성사 없는 공동체로 남아 있습니다. 성사 없이는 교회성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브루노 사건을 재심하고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는 자세의 연장선상에서 그 당시까지 이단으로 단죄했던 개신교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일치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재일치를 향한 담대한 도정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이는 부르노의 사례와는 달리 성체성사의 필요조건인 사제직의 섬김 윤리가 관철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역사상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둘 : 성체신심의 과도함 또는 냉담함

성체와 성혈의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난 거룩한 변화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자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삶과 세상에서 이룩하기 위하여 거행하는 성사적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신 데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모두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줄 거룩한 변화에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려는 종교적 태도를 성체신심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승인하고 장려하는 성체신심은, 병자들에게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성체를 모셔가는 봉성체 예식, 그리고도 남은 성체를 감실에 보관하면서 미사 중에 이루어진 거룩한 변화를 흠숭하는 합당한 경배예식 등을 행하는 관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체 조배, 성시간, 성체 강복, 성체 행렬로 발전하더니 철야로 조배하는 관습도 생겨났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성체 신심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대면 접촉으로 인한 감염 가능성을 차단하고 예방하기 위하여 방송으로 미사를 시청하고 신영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체 신심을 교회가 크게 권장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성체성사에서 거행하는 성사적 변화를 통하여 우리네 삶과 세상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삶의 원천이요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삶과 세상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려는 지향은 뚜렷하지 않은 채로, 성사적 변화를 흠숭하는 일에만 머물고자 하는 경향은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 열성이 철야로 성체를 조배하는 일로 나타난다고 해도 그러합니다. 실제적인 거룩한 변화에로 나아가지 않고 성사 자체에 몰두하는 것은 과도한 성체신심이거나 광신적 경향이라 부를 만합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보아도 도무지 알 길 없는”(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성체의 신비는 구체적인 자신의 삶이나 세상 현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가운데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으며 만져볼 수 있는 영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근거는 현대인들이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 등의 가치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변화를 통해서 체험해야만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경위에 있습니다. 먼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이라는 최고선의 가치들, 즉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 등을 세속적인 사회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하여 자기 삶을 희생하는 가운데, 아직 믿지 못한 이들이 그 가치들을 접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 종교인들이 거룩한 변화를 거부한 채로 자신의 현세적 축복만을 기원하거나, 또는 현세를 개선함이 없이 내세의 영복만을 기원하려는 기복신앙적 자세는 이 성체신심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에 대량 냉담사태를 불러오는 주범입니다. 또한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려는 자세는 부패한 세상의 기득권과도 불가피하게 충돌과 긴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종교적 권위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는 이 기복신앙 현상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려는 경향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성향의 종교적 권위는 성직주의적 경향이나 제도교회주의적 경향과도 일맥상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엄연한 현실도 지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강림하시는 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음은 물론 세상에 대하여 삼위일체적인 양식으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하지 못하게 나아가지 못하게 막음도 물론입니다. 이러한 사두가이적이거나 바리사이적 혐의의 근원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엿보였었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 평원에서의 엇갈린 반응, 열광하거나 의심하거나…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담긴 거룩한 뜻을 처음에 열어 보이신 계기는 요한 복음서 6장에서는 생명의 빵, 7장에서는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치신 때였습니다. 특히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펴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평원에서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 앞에서 이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하여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이때 군중은 많아진 빵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광하는 군중을 떠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좀 더 차분하게 이 기적에 담긴 뜻을 설명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온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을 구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구하라.”라고 그분이 말씀하시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 그분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빵에 열광하던 군중은 대부분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결단을 재촉하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그러자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이 물음과 대답이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는 몫입니다.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참여하여 삶과 세상 일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체 신심을 증거함에 있어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하고, 파스카 과업을 위한 성실한 복무자세와 이를 위한 상호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노력이 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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