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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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의 존재, 역할 그리고 현존방식

탈출 34,4-9; 2코린 13,11-13; 요한 3,16-18

삼위일체 대축일; 2020.6.7.; 이기우 신부

⓵ 폭력의 구조와 작동의 인과관계를 수직과 수평으로 설명한 프란츠 파농의 관점에 따르면, 한 사회의 상부 구조가 폭력적이면 물이 위에서 아래도 흐르듯이 하부 구조에서도 폭력적이 됩니다. 1970년대 한국 사회는 독재자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유신 체제라는 국가 폭력 속에서 온 사회가 폭력을 용인하는 시절이었으므로, 학교에서도 체벌이 공공연히 용인되었습니다. 이 시절에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교사와 이로 인해 폭력을 배워 조직폭력배로 나선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제목이 ‘친구’입니다. 이 영화에서 교사로 분장한 배우 김광규가 담임하던 반 학생들이 시험 성적을 형편없이 받으면 학생들 보는 앞에 불러내어 꼭 물어보는 말이 있었습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이 대사는 그 후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명대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작년 하반기에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을 거의 모든 언론이 물고 뜯던 시절에 아버지의 지위를 딸이 이용했다는 거짓 프레임을 씌우고 싶었던 야당 정치인들이 패러디해서 현수막으로까지 걸던 유행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형편없던 3류 언론, 더 형편없던 4류 정치가 이 대사와 영화를 기억하던 국민을 슬프게 웃기던 시절이었습니다. 

 

⓶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역할을 나누어 일하시지만 일체로 존재하신다는 교리를 선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성부 하느님의 존재와 역할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결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생겨났으며, 또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고 사도들이 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교회를 이루게 되자 성령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세상을 함께 창조하셨으며, 성부와 성자의 중개자요 창조의 근본적인 원동력으로서 성령 하느님께서도 일하셨는데, 인간이 이를 나중에 알게 된 것뿐입니다. 성자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도 성자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직 동정의 몸이었는데도 성자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신 힘도 성령이셨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도리는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선포하는 진리 가운데 으뜸가는 교리이지만, 먹고 살기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관심사가 아닙니다. 종교를 받아들이고 가톨릭교회에 입문한 신앙인들에게는 세례를 받기 전에 반드시 배워야 하고 세례를 받을 때 꼭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지만, 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여느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난 내용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천 역시 하나의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이나 신자들이 삼위일체 도리에 대해 보이는 무관심은 “삼위일체 도리가 우리 인생과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맞이한 삼위일체 대축일 전례는 거꾸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또 하느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리고 나에게와 세상에게 하느님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진지한 물음을 세속적인 패러디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⓷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그나마 희미하게라도 알 수 있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덕분입니다. 이런 계시의 행운을 얻지 못한 민족들은 그저 살아있거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의 거대한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경배하는 우상숭배의 종교치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래 모세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첫 머리에서 이렇게 간추려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도 사도가 되기 전에는 하느님을 믿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아보기는커녕 박해를 일삼던 자였고, 공생활을 함께 한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하면 열두 제자 중의 한 제자인 필립보는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8-9)

 

⓸ 사도 시대 이후 고대 교회는 인간 이성의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면서, 토착화적 관점에서 신앙고백문 속에 가장 먼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세련된 표현으로 명문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하지만 이렇듯 명확하고 사변적인 방식으로 그제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삼위일체적인 표현을 세련되고 정확하게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고백하는 교회가 세상과 신자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세속의 황제 권력보다 더 화려하고 더 권위적이며 무엇보다도 더 권력지향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하느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습니다. 고백과 실천 사이의 괴리가 컸던 것입니다. 

 

이런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신앙고백이 교리문답에 간추려져 박해시대 우리 교회에 전해져 왔습니다. “천주는 누구시뇨? 천주는 만선 만덕을 갖추신 순전한 신이요 만물을 창조하신 자니라. 천주 영원하시니, 비롯음과 마침도 없고 변하심도 없느니라. 천주 전지하시니, 모르시는 것이 없어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느니라. 천주 무량하시니, 아니 계신 데 없어 곳곳이 다 계시니라. 천주 공의하시니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이를 벌하시느니라. 천주 전능하시니, 하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하시느니라. 천주 전선하시니 모든 선의 근원이시므로 또한 우리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시느니라. 천주 인자하시니, 자기 죄를 통회하는 자는 용서하시느니라.” 

 

이상이 성부 하느님께 관한 신앙고백인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해서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천주 몇이 계시뇨?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하나이신 천주 몇 위를 포함하여 계시느뇨?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시니라.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하시뇨?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느니라. 세 위 서로 높고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별이 있느뇨?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 가지로 다만 한 천주시니라.”

 

이렇게 사변 일변도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교리를 알아들으려다가 실패한 바닷가 소년과의 일화를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알아들으려는 이성적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믿기만 하라는 권위주의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러니, 일반 신자들로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고, 알아듣고자 노력하는 것도 막는데다가, 이를 가르치는 교회의 실천도 세속과 다를 바가 크게 없으니, 아예 삼위일체 도리는 실제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별 영향력이 없는 교리로 밀려나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 교리와 실천, 고백과 현실이 다른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 가르치시던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⓹ 이렇듯 말과 행동, 교리와 실천, 고백과 현실에서 나타난 괴리를 극복하려면,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믿음을 고백하는 대로 현실을 살아야 하고, 교리를 믿는 대로 실천해야 하며, 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첫 걸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참고해야 할 매우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생명체의 진화를 관찰하고 연구한 과학자들이 알려주는 유전현상의 진리인데, 그것은 개체가 발생할 때 종의 진화를 압축하여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배아의 처지로 생명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태아의 처지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인류라는 종이 진화되어 온 과정을 아홉 달 동안 압축적으로 반복합니다. 아마도 우리 각자의 DNA 속에 생명진화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례력에서 해마다 부활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를 알려주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 계시 사건을 되풀이해서 상기시켜 주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복음화는 교회 전체가 힘을 합쳐 이룩하는 것이지만, 막상 세상을 복음화해야 할 교회 자신의 복음화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다시 태어난 그 부활에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치의 역사에서도 권력이 위로부터 개혁된 적이 없고 늘 아래로부터 개혁되어 민주화되어 왔기 때문에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말하듯이, 교회의 역사에서도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인 기운이 교회를 쇄신시키고 복음화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화되어 가는 교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기지은의 은총으로 개별 신앙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쇄신하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일곱 가지 은사로 복음을 선포하여 아홉 가지 열매를 세상의 복음화에서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결국 이렇게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개별 그리스도인들과 그들 공동체의 삶이 교회를 풀뿌리처럼 아래로부터 쇄신시키고 복음화시켜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부르심 받은 우리의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로 어두운 세상을 비출 때, 이를 본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존재 기반임을, 구세주이신 성자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기준이심을 그리고 인도자이신 성령 하느님은 믿는 이들을 이끄시는 기운이심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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