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직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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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 6,1-7; 1베드 2,4-9; 요한 14,1-12

부활 제5주일; 2020.5.10.;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이기우 신부

 

⒈ 지난 부활 제4주일에 우리는 모처럼 조용한 성소 주일을 보낸 바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덕분에 으레 가졌던 행사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성소를 묵상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에 비유하시고는 당신에게 맡겨진 양 떼에게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고 당신의 소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응답한 우리들 모두는 생명의 기운을 넘치게 받은 만큼 기쁘게 살아야 할 소명이 주어진 셈임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⒉ 그리고 그 기쁨의 소명이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자신만 기쁘게 살 것이 아니라 기쁨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도 그 기쁨을 나누어주어야 할 소명을 자연히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그 기쁨을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한 주간 내내 묵상해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대상은 이제껏 낯설었던 방식이나 세상이 소외시켰던 사람들일지라도 더 이상 속되다고 제쳐둘 것이 아님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찾아온 경제 위기 속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우리가 기쁨을 나누어주어야 할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또 조만간 마주대해야 할 북녘 동포들 역시 기쁨으로 재회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따라서 한평생 살아온 그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전하자면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또한 본당에서 재개된 미사 이후 달라진 풍속도를 예상해 보면서, 혹시 수도생활에서 신앙의 가치와 향기를 느끼고자 하는 평신도들이 찾아온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우리의 기쁨을 나누어주어야 할 각오를 다져야 함도 당연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상황과 교회의 사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면서, 전인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을 대하고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가 우리 자신임을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⒊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 떼로 간주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잘 알아 들을 것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께서 보여주신 영적인 몸의 네 가지 특징, 즉 상하지 못하게 하고, 빛나며, 빠르고, 사무치는 네 가지 신기한 은총이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에서도 구현될 수 있으리라는 전제 하에서, 이 공동체가 온전한 믿음 즉 하느님을 믿는 신앙과 서로를 믿는 인격적 신뢰와 그리고 사회적으로 일과 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용을 갖추어야 할 것임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 이야기의 메시지에 따라서, 말씀과 성찬과 더불어 온전한 믿음이 구현되는 공동체에서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발현 체험의 장이라는 것이지요. 

 

⒋ 바오로가 그리스 선교를 개척한 이래 유럽 대륙의 복음화가 시작되었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꾸준히 애덕의 실천으로 나타났지만 정작 오늘날과 같은 복지를 구현하게 된 것은 교회 바깥에서 일어난 움직임이었습니다. 즉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 노동조합 총연맹의 의뢰로 경제학자 베버리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복지를 사회가 보장하는 나라를 만들자고 깃발을 든 것이지요. 이후 이러한 복지국가 건설의 노선은 전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지금 우리나라도 이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셨던 길, 또 전인적이고 보편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인간의 구원은 이러한 물질적 복지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이 사람들로부터나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온전한 믿음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생의 최후를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끼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서로 간에는 물론이요 장차 제자들을 따르게 될 신자들을 섬기라는 뜻이요, 또한 그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을 섬기게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던, 성사적 행동이셨습니다. 

 

  이를 본받아,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이래 수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신자들과 백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제주 감귤을 보급한 선교사도 있고, 돼지와 양을 기르는 축산협동조합을 기반으로 제주 한림을 경제 공동체로 개척한 선교사도 있습니다. 이들의 선구적 역할 덕분에 흔히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신축교난 이후 이어져 내려온 오랜 반가톨릭적인 정서를 극복하고 오늘날과 같은 가톨릭 선교의 봄을 제주에서 만끽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고려 시대 이래로 육지 사람들 때문에 억압과 소외를 당해온 역사에다가, 위험한 바다에서 생업을 이어오다 보니 무속신앙이 뿌리깊었던 탓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기 어려웠던 차에 이 두 선교사를 통해서 하느님 신앙이 신뢰와 신용이라는 고마운 얼굴로 다가온 덕분입니다. 

 

  또한 전북 임실에서 치즈 생산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지역 주민들에게 신용과 신뢰를 통해 신앙을 전한 선교사도 있었고, 경기 안성에서는 유럽 프랑스에서 자라는 포도를 들여와 재배하게 만들어 준 선교사도 있었으며, 부산에서는 카나다로 가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서 최초의 신협도 세우고 신협 연수원에서 인재들을 양성하여 신용협동조합이 한국 전체에 퍼지도록 앞장선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외국 선교사로서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수도회를 창립하여 조선의 신자들 스스로 조선의 백성을 섬기라고 영적인 섬김의 모범을 보여준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외국 선교사들 덕분에 이 땅은 축복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입니다. 

 

⒍ 이 고마운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의 신자들과 백성을 섬기는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역경에서도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고 계시는 그 길을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따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세계에 우뚝 선 남한의 대한민국 국민들과, 지난 70여 년 동안 지속된 미국의 봉쇄와 제재 탓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처지에서도 사회주의 체제를 주체적으로 고수하며 살아남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들이 이제 한겨레로 만나야 하는 새 시대에서도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들끼리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어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이 하셨던 것보다 더 큰 일도 얼마든지 넉근히 해 낼 수 있습니다. 

 

⒎ 교회를 시작했던 초대교회 시절, 말씀과 사도직이라는 두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이셨고, 그 기초 위에 잡힌 모퉁이 네 구석에 자리를 잡은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말씀은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웠고 또 깨우침 받은 것이었으나, 사도직은 자신들이 한계를 느껴서, 오늘 제1독서에서 들으신 대로, 부제직무를 신설함으로써 보충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깨달은 조건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부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건, 즉 성령과 지혜의 충만함은 이후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사도직의 필수 조건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부제 직무의 자격 조건으로 설정한 바는 해당 부제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옵고 소명을 자각한 사도들의 몫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증거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도직이 필요하고 그 사도직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도 성령과 지혜의 충만함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사도직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⒏ 이렇게 하여 교회는 부활 신앙에 입각한 사기지은의 공동체로서 역사에 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다가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고나서는 국교가 되기까지 하면서 교회의 사도직 활동은 자유로워진 반면 제국 교회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정체성의 위기는 심각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태동된 것이 수도회 운동이었습니다. 박해 시절에 순교를 각오하고서라도 받아들이던 그 믿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원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의 편리함이 보장된 도시를 벗어나 황량한 사막을 마다하지 않고 나가서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며 복음적인 공동체를 시작했고, 여기서 얻어진 활력으로 수도회의 영성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 했던 교회의 신앙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성령과 지혜의 충만함이 처음으로 맺어진 결실입니다. 

 

9. 베네딕토와 프란치스코의 출현과 활약에도 불구하고 근세 이후 유럽에서 교회의 전반적 활력이 가라앉은 배경에는 수도회의 활력이 쇠락하게 된 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성을 잊어버리고 기득권 세력에 편입되어 버린 수도회들을 시민혁명군은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행위를 일삼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수도자들이 신앙을 잃어버렸다든가 수도자 상호 간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로지 그 원인은 단 하나, 사회적 매력을 상실하고 사회적 신용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협동조합 운동이 온갖 시행착오를 반복해 가면서도 끊임없이 일어났고, 지금에 와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신앙에 바탕한 신뢰와 신용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침체되어 가는 듯 보여도 여전히 사회의 저변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산으로 버티고 있는 유럽 사회를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유럽 사회에서 보여지는 두 흐름, 즉 수도회 운동의 오래된 저류와 새로운 흐름, 수도회의 깊은 영성과 협동조합의 선교적 지향이 한국 사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성령과 지혜의 충만함이 맺을 수 있는 또 다른 결실이 될 것입니다. 

 

⒑ 공동체가 부활 신앙에 입각한 사기지은을 누리고 싶다면, 신앙과 신뢰와 신용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 옛날 초대교회에서 교회 내부의 위기 요인 때문에 부제 직무를 신설하느라고 요청되었던, 그리하여 교회를 새로운 사도직 활력으로 채워놓았던 성령과 지혜의 충만함은 이 새로운 사도직 요청에 있어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 땅의 선교 역사에서는 유럽에서의 협동조합의 전통을 도입하여 성공적으로 선교적으로 응용한 선각자 선교사들의 모범 사례마저 우리는 알고 있는 터입니다. 복음의 숨겨진 보물은 속되다고 여겨지기 쉬운 가난한 이들에게 감추어진 복음적 가능성을 발굴해 내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들은 수도 공동체의 영성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수도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선교적 지향에서 활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젖어 살아온 대륙 북방의 주민들을 만나기 위한 아주 요긴한 준비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자본과 시장에만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판을 치고 있는 남녘 땅에서도 실로 참신하면서도 영적 매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발산할 수 있는 사도직을 개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의미로, 우리 교회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적 교회로 거듭 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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