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부활하신 우리 주여, 우리 부활시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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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 2,14.22ㄴ-33; 1베드 1,17-21; 루카 24,13-35

부활 제3주일; 2020.4.26.; 이기우 신부

⒈ 부활시기에 자주 불리워지는 성가 중에 134번 성가가 있습니다. 그 제목이 ‘거룩하다 부활이여’입니다. 저는 이 성가를 참 좋아합니다. 특히 4절 가사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께 영원무궁 영광이여 부활하신 우리 주여 우리 부활시키소서” 이 성가 구절을 들을 때면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활시키시려고 보내주시는 기운이 용솟음치는 듯해서 가슴이 설레곤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일은 신앙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약한 신자들이 태반입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거나 또는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우리 앞에 나타나고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아예 없거나 죽은 다음으로 막연하게 미루어두는 일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활시키신다는 성가는 그런 우리의 약한 신앙을 채찍질합니다. 우리를 채찍질하는 것은 성가 가사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전해주는 복음 말씀도 있습니다. 

 

⒉ 부활 제3주일인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발현을 체험한 기사 중에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마치 맑고 투명한 수채화처럼 펼쳐진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을 비롯해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교훈이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뵈올 수 있는 길에 대한 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는 곳은 두 곳이나 방식은 세 가지입니다. 그 첫째는 말씀이요, 둘째는 성찬이며, 셋째는 사랑이 실천되는 공동체와 이를 위한 사도직입니다. 그러니까 발현의 양식과 현존체험의 양식이 이렇게 세 가지로 나타나지만 말씀과 성찬이 미사 전례에서 함께 이루어지니까 장소로는 성당과 사도직 현장이며, 방식으로는 말씀과 성찬과 사도직의 세 가지입니다. 전례와 사도직,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네 신앙현실의 쇄신과제는 아주 분명하게 떠오르지요.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서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따라서 그분의 현존도 체험하는 것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이고, 또 말씀과 성찬에서 주님을 알아본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사도직 현장으로 나아갈 기운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입니다. 

 

⒊ 오늘 복음의 상황은 예루살렘에서 10km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열두 제자단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함께 했으며 그래서 갑작스럽게 닥친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너무나 충격을 받고 실망한 두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침통한 표정’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모든 기대가 사라진 이상 그분의 제자로서 복음을 선포하며 살고자 했던 포부도 포기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다가서신 그 나그네로부터 성경 전체에 걸쳐 메시아와 그분의 수난에 관한 예언 말씀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을 보살피는 양치기처럼 좌절한 제자들을 일부러 찾아나서서 차근차근 일깨워주시는 예수님의 그 심정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그 자상한 설명을 듣고 있던 두 제자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우리도 미사 중 말씀 전례에서 주일에는 가, 나, 다 해로 나누고 평일에는 홀수, 짝수 해로 나누어 성경 전체의 말씀을 듣습니다. 구약성경 46권, 신약성경 27권, 도합 73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의 거의 전 대목을 골고루 들을 수 있도록 전례독서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세 꼭지, 평일에는 두 꼭지의 말씀을 읽는데,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어 읽는다는 뜻에서 봉독(奉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독서자는 다 읽고 나서 반드시, “주님의 말씀입니다.”라는 말로 마치는 이유도 이 성경 말씀을 듣는 청중이 독서자의 말로 알아듣거나 성서에 쓰여진 이야기라는 정도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으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복음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앉아 있던 청중이 일어서되 복음 봉독자를 향해서 시선을 향하게 되어 있는 전례규정도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독서와 복음에서 발췌한 성서 대목이 하느님의 말씀임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시키고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강론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강론은 성경 대목 안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강론을 듣는 신자 청중은 말씀의 뜻을 더욱 생생하게 깨닫고 알아들으며 나아가서는 세상에 나가서는 이 말씀대로 생활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어가야 하는 것이고 그 다짐이 보편지향기도에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보편지향기도는 그날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⒋ 낯선 나그네로부터 뜻밖의 말씀 선물을 받은 두 제자는 헤어지기가 아쉬웠던지 하룻밤을 묵어가시기를 청했고 그분은 선선히 응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누게 된 저녁식사에서 그분은 최후의 만찬에서와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엠마오 만찬에서는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 몸을 상기시키셨을 것이고 포도주를 따라서 나누어 주시면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 피를 상기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께 십자가는 성체성사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기까지 해야 했던 그 삶을 기억시키고 계승시키려고 제자들도 불러 양성하신 것이었고 최후의 만찬도 의도적으로 정성들여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만난 두 제자도 아마도 들은 기억은 있었을 것입니다만, 워낙 십자가 죽음 사건이 주는 충격이 컸던 탓으로 망각하고 있었다가, 예수님께서 빵에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하시는 기도 말씀에 옛 기억들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는 당부 말씀까지 덧붙이셨지요? 이것이 그 순간에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분을 알아본 이유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미사의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할 때마다 사제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상기시켜 주고 있지만,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참석하는 신자들에게는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수가 많은 듯합니다. 그러니 성체를 나누어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을 해 주어도 그 응답으로 ‘아멘!’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분을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별 신자들이 지닌 신앙의 수준이 여기서 나타난다고 하겠고, 미사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시킬 수 있는 전례의 역량과 성과가 여기서 판가름납니다. 

 

⒋ 일단 당신을 알아보는 눈이 열린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 앞에 계실 이유가 없어서 눈앞에서 사라지습니다. 이 사라지심은 그분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라는 새로운 부르심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아야 했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러 갈릴래아로 가라는 부르심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현존을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분에 대한 기억으로, 그래서 그 기억 속에 들어 있던 하느님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찬의 양식으로 나타나는 주님의 이 발현은 세상에 나가서 사도직을 실천함으로써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라는 부르심이요, 그 공동체에서 더욱 분명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라는 독촉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에서야말로 또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사도직 실천에서야말로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뵈올 수 있을 것이고, 그제서야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제는 말씀과 성찬에서 체험한 주님의 발현을 증거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과제는 말씀과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의무로 주어지는 데 비하면 개별 신자들에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며, 한다고 해도 개인들의 재량에만 내맡겨져 있는 형편입니다. 그 결과 십 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준이 유치한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분명한 기준과 빛을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닮아야 할 인간 존엄성의 원리에 따라서 인격성에 따른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것과, 전인적이고도 보편적으로 이 인격성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원리에 따라서 사회적 공동선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이후의 세계는 이 인격성과 공동선의 조화를 더욱 중요시하는 요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이 봉쇄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감염 확산에 성공함으로써 방역의 글로벌 스탠다드로 인정받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경제와 교육, 주거와 고용 등의 영역에서는 공동선이 너무도 취약합니다.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해묵은 과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그동안 정치가 이런 분야의 구체적 공동선에 둔감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자신의 직업과 활동 영역에서 더욱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노력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뵈옵게 하고 스스로를 부활시킬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여, 우리 부활시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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