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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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 2,42-47; 1베드 1,3-9; 요한 20,19-31 

부활 제2주일; 2020.4.19.;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를 마감하는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 덕분에 우리는 사도들이 부활을 믿기에 이르른 경위가 매우 치열했다는 것과 세상의 무신론자들이 오해하듯이 광신적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오히려 발현 체험을 바탕으로 부활을 믿는 합리적 태도야말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부활 신앙에로 이끌어주는 안전한 길임을 확인합니다. 

 

토마스 덕분에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옵는 체험을 하게 된 사도들은 이제 창조주 하느님께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구약성경을 완전히 새로 해석할 수 있는 지평을 얻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복음에 나온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선사하신 일을 떠올리며,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처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새로이 창조하시려는 분이심을 깨닫고 창조적인 부활 신앙을 신자들에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게 된 사도들이 여러 가지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거룩한 변화를 보이자, 이로 말미암아 신자들도 창조적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그 거룩한 변화의 기운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던 아담과 하와처럼 초대교회 신자들은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⒉ 무덤을 비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과 삼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수난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세 차례나 들었던 직제자들마저도 단번에 부활 신앙이 생겨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 역시 온전한 부활 신앙에 이르는 길이 그리 순탄할 수만은 없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의 경우를 보면, 한 번 믿기가 어렵지 일단 믿고 나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하느님께 바칠 수 있을 만큼 그 변화의 폭과 정도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토마스는 열두 제자 가운데 의협심이 강하고 충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불신앙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료 제자들의 전갈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어야만 믿을 수 있다고 버티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나타나신 예수님 앞에서 토마스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로써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부활 선포가 한낱 광신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 셈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합리적 태도의 소산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후대의 신앙인들을 위한 토마스의 공헌이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토마스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먼저 믿은 이들의 증언만으로는 그들이 섣불리 믿으려 들지 않으며 오히려 믿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역시 토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편견을 깰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어야먄 비로소 부활 신앙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부활 신앙을 역사 창조적이며 공동체적 희망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선교적 전망과 함께 이 전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체험 위주의 선교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⒊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토로하고 있는 고백은 부활 신앙을 창조적 전망 아래에서 바라보게 해 주는 결정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은 나자렛 예수라는 한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위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적 전망 아래에서 드디어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제껏 어느 문명에서도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적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생활입니다.  

 

⒋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믿음의 힘은 제자들을 거쳐 세상에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경위를 보면 이렇습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에는 먼저 이적과 표징들을 보여준 사도들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과, 또 그분에게서 공생활 시절 동안 배운 바가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기적들과 표징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다는 기적과 표징을 사도들에게서 보게 되자 믿음이 확실해 질 수 있었던 신자들도 이기심과 욕심을 이겨내고 공동체라는 거룩한 변화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닌데도 마치 식구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또 사람이라면 누구나에게 있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고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신자들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들이 필요한 대로 나눔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표징입니다. 

 

이런 믿음 전달의 경위가 마치 전기가 발전소에서 생산되어 변전소와 변압기를 거쳐 각 가정에서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는 이치와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발전소와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에너지를 그분께서는 당신 일생 동안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소진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기운이 전달되자 그들은 사도로 변화되었고 사도들은 변전소 의 역할을 해 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부터 사도들을 알아왔던 신자들은 그들이 놀랍게도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그 기운에 감전되듯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룩한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도 손쉽게 얻어다 쓸 수 있는 변압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들의 공동체가 발산하는 매력에 이끌려 호감이 생긴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신자 공동체에 합류하더니 그들도 믿음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보여준 선교의 비결이었습니다. 아무런 전략도 없었고, 그 어떠한 인위적 행위도 필요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갔을 뿐입니다. 

 

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룩한 이 놀라운 역사 창조의 업적은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도 그러했습니다.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요한 23세 교황의 호소에 따라 초대교회의 모습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보물을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요즘 말하는 공동체입니다. 

 

공의회가 열리던 무렵에 세상에서도 이 공동체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공동 생활과 재산의 공유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에만 주목했을 따름이지만, 공의회가 새로 발견한 공동체는 그보다 더 심오한 기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에 따른 하느님의 자비라는 기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섣불리 공동 생활에 나설 수 없고, 재산의 공유는 생각도 할 수 없으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공의회 직전 시기에 바로 이 신비를 온 몸으로 체험한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수녀도 폴란드 출신이었고, 수도회에 들어가 겪은 예수님의 환시를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서 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를 미처 졸업하기도 전에 수도 성소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게 된 파우스티나는 낮은 학력 탓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1931년 2월에 예수님께서는 가슴에서 피와 물이 빛줄기의 형상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으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나타나셔서 온 세상에 자신의 한없는 자비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고합니다. 그 메시지가 이렇습니다. “내 딸아, 이 말을 기록하여라. 내 자비에 대하여 세상에 말하여라. 옅은 빛줄기는 영혼을 의롭게 하는 물을 나타내고, 붉은 빛줄기는 영혼의 생명인 피를 의미한다. 이 두 빛줄기는 십자가에서 창에 찔린 내 심장이 열렸을 때, 내 깊은 자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모든 인류가 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깨닫게 하여라.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 대한 표징이다. 이것이 지나면 정의의 날이 올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그들이 내 자비의 샘에 의지하게 하여라. 그들을 위해 쏟았던 내 피와 물의 공로를 입게 하여라.” 

 

이 메시지와 함께 그때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상본이 ‘하느님의 자비 상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를 이미 추기경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직에 오른 직후인 1978년에 그 수녀의 일기장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 신자들이 읽어볼 수 있게 하고 나서 1993년에 시복하였고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시성하면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당부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에 따라서 그 날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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