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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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 10, 34-43; 콜로 3,1-4; 요한 20,1-9 

주님 부활 대축일; 2020. 4. 12; 이기우 신부

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우리가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축하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굳게 믿게 된 경위를 잘 알고 그 경고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으로 들으신, 빈 무덤의 체험 속에서 발현 체험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탄생인데, 이 빈 무덤과 발현 체험 이야기 안에 우리가 새로 태어날 수 있고, 우리 교회가 복음적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이었고, 숨을 거두신 후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내어준 돌무덤에 부랴부랴 모시고 난 시각이 이미 해가 기울어 질 무렵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율법 규정상 시신에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는지라 그대로 두고 안식일이 완전히 끝난 일요일 이른 아침에 그 돌무덤으로 갔던 사람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서 십자가 형장에 예수님께서 숨지시는 순간까지 남아 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네들은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림으로써 염을 해 드리려던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입구가 열린 무덤 안은 그 내부까지 바깥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비백산한 막달레나는 한걸음에 제자들에게로 달려가 알렸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달레나의 이 외침을 듣고 두 제자가 움직였는데, 요한의 움직임이 빨랐고 베드로는 느렸습니다. 그래서 돌무덤에 먼저 도착한 요한이 입구에 멈추어 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과연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만 놓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시신이 사라진 사실만 확인했을 뿐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베드로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뒤따라 도착한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만 놓여 있었고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분의 시신이 도난당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반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때까지 그 사실이 부활의 반증이라고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 

 

⒉ 성서 주석의 최고 권위는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들의 성서 주석입니다. 이 가르침을 근거로 성서를 해석하는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 본문이 후대의 교회를 위한 심오한 표지가 숨겨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막달레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을 대변하는 인물이요, 요한은 이 현장 선교사들을 돕는 현장 교회의 카리스마를 대변하는 인물이며, 베드로는 이 현장교회들 모두를 아우르는 제도 교회의 권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장은 위기를 제일 먼저 감지하는 복음선포의 최일선이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울부짖음을 대변합니다. 이 울부짖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장 교회는 빈 무덤과도 같은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발빠르게 대처합니다. 하지만 위기에 숨은 위험성을 확인하는 데까지만 그러하고 그 원인과 대책을 수립하는 일에 있어서는 제도 교회를 기다려주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과연 제도 교회는 전체 상황을 아우르고 나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다음 모두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대책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의 위기 체험은 발현 체험이라는 기쁨과 희망의 체험으로 전환됩니다. 여기서 현장과 현장 교회, 그리고 제도 교회 사이의 긴장과 함께 삼 자 간의 조화와 협력이 가능해질 가능성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요한복음 제20장의 본문이 시대마다 거듭 닥치는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바탕 위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또는 우리 모두의 부활을 향해 나선형처럼 진보해 나가는 방향에 대한 소중한 나침반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⒊ 부활은 새로운 탄생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셨습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다시 원래대로 하느님의 자리와 지위에로 원대복귀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강생하실 때에는 남자 없이 여자의 태중에서 잉태되시는 기적이 있었고 육신을 지닌 사람으로 사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내용은 복음적인 삶이었으되 그 삶을 둘러싼 것은 사람의 육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분이 부활하시면서는 그 육신의 제약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시신이 무덤 안에 누워있지 않을 수 있음은 물론, 영혼이 더 이상 육신의 욕구나 죄로부터 고통을 겪지 않게 되셨으며 음식을 드실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등 육신의 본능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셨을 뿐만 아니라 나그네나, 동산지기나, 어부로나 자유자재로 그 모습을 바꾸실 수도 있게 되셨습니다. 또 이미 타볼산에서 세 명의 제자가 경험한 것처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실 수도 있게 되셨습니다. 또 순식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실 수도 있는가 하면 한 번에 여러 곳에서 나타나실 수도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니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보여주신 이 영적인 몸을, 세례 때에 저마다의 영혼에 부여받았습니다. 이 영적 생명은 신앙생활로 성장하는 새로운 몸입니다. 이 몸이 성장하다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면 마침내 온전한 모습의 영적인 몸으로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몸이 우리가 신앙고백문에서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이 보여줄 미래입니다. 이는 죽고 나서야 온전한 상태가 될 수 있지만, 세례 때부터 신앙의 수준에 맞추어 서서히 성장합니다. 이것이 교리 용어로는, 상하지 못함과 빛남과 빠름과 사무침을 뜻하는 네 가지 은총 즉 사기지은(四奇之恩)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몸이 지니는 네 가지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상하지 못함’의 은총으로써,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로 인해 다시 살아난 몸으로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도,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2)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세례 때에 영적인 몸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온전하지는 않으나 죄로 인한 상처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용기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상하지 못함’의 은총은 사랑을 실천할 용기를 뜻합니다. 

 

두 번째는 ‘빛남’의 은총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몸은 더 이상 육신의 본능에 지배당하지 않고 영혼이 이끌기 때문에 천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닦은 덕행과 실천한 선행 덕분에 빛납니다. 사도 바오로도,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3) 하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은총은 덕행과 선행의 품위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빠름’의 은총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몸은 육신 본능의 한계에 굴복하는 미약한 모습을 지나 이를 넘어섭니다. 사도 바오로도,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3) 하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아무 수고나 피곤함을 모른 채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아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은총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조직력과 기동력을 뜻합니다. 

 

네 번째는 ‘사무침’의 은총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몸은 시공의 제약에 갇혀있지 않고 이를 넘나드는 통공의 자유로움을 구사합니다. 무덤을 비워놓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잠궈 놓은 방을 자유로이 드나드신 데에서 볼 수 있는 이 은총은,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4).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은총은 시공을 넘어서는 통공과 연대의 힘을 뜻합니다. 

 

⒋ 사기지은으로 나타나는 부활의 은총스런 현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여인들에게 보여주신 바대로, 육신의 욕망과 죄로 인한 위협으로 자유로워진 영적인 몸을 목표로 합니다. 죽어서야 온전히 성취될 영적인 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이상  살아있는 동안 신앙의 성숙 여하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이 현실을 희망하기에 부활과 그에 담긴 영적인 몸에 대한 희망은 새로운 전망과 윤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교회, 새로운 신앙 그리고 새로운 사도직을 출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기지은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삶의 활력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에 이끌리는 새로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가정과 사회라는 삶의 현장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한의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런 연후에 베드로의 역할과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에 따른 새로운 성소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에 따른 새로운 성소의 두 기둥은 가정과 사회라는 두 가지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이 쇄신되어야 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신앙의 사기지은에 따른 활력과 자발적 조직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던 유럽의 교회들은 이 점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오늘날 신앙의 활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 교회는 부활을 전례로만 거행했을 뿐, 가정과 사회의 현장에서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 할 사기지은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현장과 제도 사이의 교회적 긴장과 조화를 이루는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의 위기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세워져야 함을 웅변적으로 반증하고 있는 빈 무덤과도 같습니다. 가정은 기초교회이고 가장은 가정교회의 사제라는 의식을 각성해야 하고 사제인 이상 자녀들에게 축보기도와 안수를 해 줄 수 있으며, 아버지만 가장이 아니라 어머니도 가장이라는 인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이요 어머니는 가모장입니다. 그런데도 가정이 가족기도를 잊어버리고 세속화되어 가게 되면 세상이 겪는 가정위기는 신자가정에도 여지없이 불어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현실에서도 사회사도직이 사기지은의 은총으로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즉, 각자가 선택한 직업에도 성소가 깃들여 있음을 깨닫고 사회 공동선을 증진하는 활동에 있어서 사도직을 결성하고 조직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추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정이건 사회 활동의 현장이건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장적 의식과  실천이 살아 있어야 성당과 전례라는 교회의 제도적 요소가 비로소 생기를 얻게 되어, 성령 기운의 순환과 균형 및 조화가 이루어져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건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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