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라자로 소생 사건과 부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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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제 37,12ㄹ-14; 사도 8,8-11; 요한 11,1-45 

사순 제5주일; 2020.3.29.; 이기우 신부

⒈ 사순 제5주일인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로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제1독서에 보면, 에제키엘 예언자도 일찍이 이 기적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바 있습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기원 전 6세기 경에 활약한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이민족의 노예로 살면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는 하느님 앞에서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던 처지였습니다. 그리하여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에서 그 해골들이 일어나 살아 있는 병사로 소생하는 환시를 본 에제키엘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새로 재건되는 환시까지 보고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회복되는 꿈을 예언으로 전했습니다. 

 

에제키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일로서 예언했던 바를 사도 바오로는 더욱 보편적으로 확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즉,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믿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게 될 일이며, 또한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내세에 걸쳐 일어나는 전반적인 인류의 부흥을 내다보았고, 그러자면 언젠가는 다시 죽게 마련인 육신의 소생이 아니라 영을 통하여 죽을 몸이 다시 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⒉ 라자로는 예수님께서 아끼시던 친구였습니다. 그분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지치실 때마다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으로 가서 쉬시곤 하셨습니다. 라자로에게는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두 자매가 있었는데, 동생인 마리아가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커다란 자비를 입게 된 이후 마리아의 소개로 예수님께서 라자로 가족과 교분을 쌓으시게 된 것 같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도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와 함께 이 집에 찾아와 머무르시던 어느 날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라자로 가족과의 절친한 관계를 통하여 봉사와 관상의 의미와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습니다. 열세 명이나 되는 장정이 방문했을 때 그들의 음식 시중을 비롯해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수발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겠지만, 가는 곳마다 병자와 장애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만을 바라는 군중을 상대해야 하고 또 가르침을 들려주어도 그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 같은 무리들을 상대해야 했던 예수님으로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마음을 다해 들어줄 상대도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과 제자 일행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분주한 몸놀림으로 수발 들어주던 마르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시면서도, 당신의 말씀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던 마리아의 몫을 빼앗지 말도록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생활이 3년을 넘어갈 무렵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두 자매로부터 받으셨습니다. 평소 같으면 즉시 달려가서 그 병을 고쳐주고도 남았을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이 전갈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습니다. 마치 죽기를 기다리시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이틀 후 라자로가 죽었음을 직감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라자로가 죽어서 묻혀 있는 동굴 무덤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언제나 제 기도를 들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기도드립니다.” 이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이리하여 죽어서 묻히기까지 했고 묻히고도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⒊ 이렇게 되자 이 소문은 급속도로 가까운 예루살렘에까지 퍼졌고 마침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던 군중은 그분이 이번에는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놀라운 신적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지도자로 모시고 로마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꿈꾸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낌새를 눈치챈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되면 로마군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고 자신들의 특권도 박탈당하게 될까봐 그분을 제거하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법한 각본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 이틀 후에 그에게 가려고 하실 때에 눈치빠른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비장하게 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면 그 때문에 오히려 당신 목숨이 위험해지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럴지언정 죽었다가 당신이 부활하실 것도 믿고 계셨기 때문에 라자로의 소생이 당신 부활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표징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목숨을 걸 수도 있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에 관한 신앙을 심어주는 일은 예수님께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같은 취지로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산꼭대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세와 엘리야도 불러내시고 함께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까지 연출하셨습니다. 물론 그 순간에 그분의 모습은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모습으로 거룩하게 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제자들에게나 군중에게나, 이미 하느님을 믿어온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다만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다시 하느님의 자리로 돌아가실 분이심을 알려주는 메시아 신앙과 함께, 당신을 믿는 이들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신앙에서 시작해서 부활 신앙을 간직하게 하는 일도 중요하고 중요한 만큼 어렵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그 신앙에 이르는 길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십자가 신앙까지 겸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⒋ 사실 예수님께서는 소생 기적을 여러 번 일으키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에 살던 과부의 외아들, 왕실관리의 아들 그리고 라자로 등 죽은 이들을 살려주신 일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 사건을 일으키시는 틈틈이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하셨고, 그때마다 수난과 부활을 함께 예고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 없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매우 강경하고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신앙에 대한 가르침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최후의 만찬에서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하인들이 주인에게 하듯이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면서, 당신이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제자들끼리도 서로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족례 예식은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의 성사였습니다. 그 전제 하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당신의 뒤를 이어 성체성사를 거행할 임무를 서로 섬기는 조건을 채우는 사도들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서로 섬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채우지 않고도 자동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수 있다는 명제는 예수님께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자격을 받는 사제들이 성사를 집전하기 전에 입는 수단은 과거 로마에서 노예들이 입었던 옷이었고 이것이 바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전제조건을 상징하는 표시입니다. 그 색깔은 세속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검은 색입니다. 사제 중에서 주교가 입는 자주색 수단은 통회를 뜻하고 추기경의 진홍색 수단은 순교를 뜻하는 같은 맥락입니다. 서로를 섬기고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이 전제조건이야말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도 봉사해야 하되 세속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봉사하는 하느님의 종이라야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성체성사에서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도 십자가 신앙에서 출발하여 부활 신앙과 메시아 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우리의 길잡이가 십자가임을 보며, 십자가가 주는 희생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효과를 믿는 신앙으로만 우리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에제키엘이 내다본 바대로, 하느님 백성이 부흥할 수 있는 조건 역시 이 십자가라는 목표에 적중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권고한 대로,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영으로 살아갈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역시 십자가라는 표적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고대 로마의 제국주의와 중세 봉건영주제의 질서에 토착화된 시절을 거쳐오면서 복음적인 토양에서 생겨난 이 섬김의 취지는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성체성사를 집전하고 거행하는 성직자들의 교계제도는 섬김보다는 다스리거나 군림하는 이미지에 더 가깝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보편사제직에 사해야 할 직무사제직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섬김의 문화는 아직 멀었고 의사결정과정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제도화의 길은 훨씬 더 멉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프랑스어로 다시 태어남을 르네상스라고 하는데, 유럽 역사에서는 문예부흥을 뜻합니다. 신적인 종교질서가 지배적이던 중세에 이슬람 문명에서 얻은 지적 자산을 토대로 인간적인 모든 가시적 매력에 눈을 뜸으로써 생겨난 문예부흥을 후대의 근세인들은 인류가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로 르네상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예부흥이 토대가 되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라는 경제부흥도 이룩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로 인류가 얻은 경제적인 소득과 문화적 혜택도 많지만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어 비인간화 현상과 양극화가 심해지는 대가도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이제 신앙의 르네상스가 필요합니다. 메시아 신앙에서 십자가 신앙을 통한 부활 신앙으로 우리는 교회와 겨레의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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