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 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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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 5,8-14; 요한 9,1-41

사순 제4주일; 2020.3.22.; 이기우 신부

⒈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눈에 뜨이게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본당을 비롯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서 미사를 중단한 지도 벌써 한 달째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비상사태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 확산 경로와 속도에 전문가들도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지 못하여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에 지구상에 사는 온 인류가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나라들까지도 속수무책으로 한국의 선진적인 방역 시스템을 부러워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국의 방역시스템이 투명하고, 민주적이며, 첨단 기술을 활용하고, 효율적이며, 의료의 수준이 높다고 세계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부들만이 아니라 선진국 언론들이 더 나서서 그러고 있는데도 우리 언론과 야당은 헐뜯기만 하고 있지요. 언론과 야당의 후진성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진실을 보는 눈이 없는 눈뜬 소경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처음 겪는 일이 아닙니다. 거의 해마다 발생하는 구제역, 조류 독감, 사스(SARS), 신종플루, 메르스 등 변종 바이러스들이 현대 의료계의 역량과 기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한 바 있습니다. 사실 역사상 전염병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일들이 많았습니다. 천연두, 황열, 흑사병 등 세계사까지 바꾼 대형 전염병들이 그렇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이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농업을 발달시키며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는 과정에서 동물에게 기생하던 바이러스들이 사람들에게 옮겨오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요행히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면역력이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바이러스도 변종으로 진화하여 살아남았습니다. 특히 유럽백인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는 면역력이 떨어지는 원주민들이 정복자들이 퍼뜨린 병원균에 감염되어 죽임을 당한 숫자가 무기로 살해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정복으로 이룩한 신대륙 선교의 어두운 뒷면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대결하는 가운데 인류도 지금껏 생존해 왔고 또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바이러스들과 싸우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까지도 그러했듯이 동물들 안에서 기생하고 있는 바이러스의 존재 자체는 퇴치하거나 박멸할 수 없으며 또 가축 없이는 인류의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이상,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 안에서 번식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면역력을 더 키움으로써만 승리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공존하는 길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⒉ 그런데 또 다른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클래식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퍼뜨린 <베토벤 바이러스>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드라마로서, ‘클래식’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로 이야기 구조도 탄탄하고 진행도 치밀하며 완성도가 높다는 호평을 얻으며 장안의  인기를 차지했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시청했던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클래식 전문가나 애호가는 아니었지만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는 저마다 막연한 동경심을 지니고 있었던지라 자신들처럼 각자의 삶에 짓눌려 클래식 음악이라는, 특히 무대에 서 본다는 꿈을 접고 살았던 아마추어 연주가들에게 동질감과 공감을 느껴서 그토록 높은 인기를 누렸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이들이 우연한 기회에 모여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게 되고, 이를 이끌게 된 지휘자 강마에가 독선적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창피도 당하고 모욕도 감수하지만 그 덕분에 연주 실력이 향상되기도 합니다. 이럭저럭 전체적으로는 엉성했던 초기 모습에서 각 단원들의 서민적인 아픔과 역경을 헤치고 정식 무대에 올라 번듯한 오케스트라를 완성해 내는 이야기가 자못 감동스러웠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그 당시 한국 사회에는 때 아닌 클래식 붐이 생겨나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다 큰 맘 먹고 연주회에 가서야 듣고 볼 수 있었던 클래식 연주를 안방에서 매주 들을 수 있게 해 준 드라마가 이 <베토벤 바이러스>였고, 또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물게 클래식 연주자와 관현악단을 소재로 하고 오케스트라라는 독창적인 배경을 설정했었기 때문에, 베토벤의 ‘제9번 합창 교향곡’이라든가, ‘헝가리 춤곡’, ‘넬라 환타지아’, ‘경기병 서곡’, ‘리베르탱고’에 이어 대중가요인 ‘거위의 꿈’처럼 주옥같은 음악들이 드라마 중에 연주되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었었습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바이러스도 있음을 일깨워 준 드라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옮기는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이런 바이러스는 우리의 면역력을 더 강화시켜 줍니다. 

 

⒊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생소경을 만나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이유로 바리사이들은 그 소경에 대해서나 예수님께 대해서 트집을 잡았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게 된 것조차도 그 사람이 하느님께 죄를 지은 탓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부모의 죄 중에 태어났거나 그 조상들이 지은 죄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죄가 남아 있는데 태생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리사이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 태생소경의 치유를 안식일에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도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드디어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 줄 감수성이 그들에게는 없었고, 비록 죄로 인해 눈이 멀게 되었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뛰어넘어 눈을 뜨게 해 주실 만큼 뛰어난 치유 능력이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에게만 가능하리라는 상상력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은 눈을 뜬 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마을 밖으로 내쫓아버리는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 태생소경에게 인생에서 가장 기쁜 사건으로 기억되었겠으나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스스로 자기를 심판해 버린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해박하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정작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 소행으로 미루어볼 때, 율법주의의 폐해가 하느님을 못 보게 하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뜬 태생소경은 예수님을 믿게 된 반면에, 이를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눈먼 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⒋ 실로암 연못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바리사이들의 영적 소경 상태를 폭로한 계기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질병이 만연해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처럼 위생여건이 좋지 못하고 의료기술이나 의학지식도 많지 않았던 당시에는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치유해 주시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셔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가시는 곳마다 아픈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분은 일일이 다 고쳐주시면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 현상이 바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었고 그분이 심어주고자 하시던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아무리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라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이었고 먼저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고서 믿게 된 이들에 의해서 퍼져가는 일종의 바이러스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능력을 체험한 당사자나 이를 목격한 군중에게 반드시 믿음을 요청하시곤 하셨습니다. 

 

⒌ 사도 바오로도 한때는 율법에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눈뜬 소경과 같은 처지에서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벼락을 맞고 나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에페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이 권고를 하면서 사도 바오로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교우들이 행해야 할 선과 의로움과 진실에 대해서 일종의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의식이 잠들어 있으면 깨어날 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기 때문에 눈먼 소경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됩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본당 등지에서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교우들이 행해야 할 바를 일깨워주는 길잡이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지금은 대송(代誦)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주일에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을 실천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게 되면 잠자고 있는 사람처럼 자기 위생에만 신경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숨겨진 사회의식이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깨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의 눈이 비로소 떴다는 표시입니다.

 

둘째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잠자는 사람이 그저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처지라면, 죽은 사람은 아예 그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처지와도 같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인 사람이 창조주를 알아보는 믿음이 없으면 그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가운데에서 선행을 실천하는 교우들은 사람들의 숨겨진 사회의식만을 일깨울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의 원천이 하느님께로 향한 믿음이어야 함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 비상시국에 더욱 더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또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누군가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눈도 뜨이게 했다는 뜻입니다. 

 

⒍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된 노래가 ‘넬라 환타지아’입니다. 엔리오 모리꼬네가 작곡하여 영화 <미션>의 주제곡으로 사용된 ‘가브리엘의 오보에’에다가 이탈리아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작곡가 모리꼬네에게 3년 간이나 졸라서 마침내 어렵사리 허락을 받고 가사를 붙였다는 뒷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오보에의 목관악기 음으로 듣는 느낌도 좋지만, 사라 브라이트만의 음성으로 듣는 느낌도 환상적입니다. 그녀는 환상을 보는 자신의 정서를 담아 이렇게 가사를 붙였습니다. 

환상 속에서 / 난 올바른 세상이 보입니다 / 그곳에선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 / 영혼 깊이 인간애가 가득한 그곳 / 환상 속에서 / 난 밝은 세상이 보입니다 / 그곳은 밤에도 어둡지 않습니다 /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 / 환상 속에서 /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 그 바람은 친구처럼 도시로 불어옵니다 /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 /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곳”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위축되어 버린 듯한 우리네 마음이 믿음의 빛을 환히 비추어 받을 수 있다면, 사라 브라이트만이 노래하고 있는 대로, 우리네 영혼이 자유로운 환상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 사회 현실도 훨씬 올바르고 밝고 따뜻한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영혼이 자유롭게 되면 우리도 사실은 눈은 뜨고 있으나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면 바리사이들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세례 때에 비추어진 하느님의 빛이신 그분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면 행할수록 하느님을 보는 눈이 밝아질 수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태생소경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기꺼이 고백할 수 있었듯이, 오늘 태생소경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도 침침했던 눈이 더욱 밝아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영혼의 눈이 맑아지기를, 하느님을 보는 눈이 밝아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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