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너희의 의로움이 저들을 능가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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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집회 15,15-20; 1코린 2,6-10; 마태 5,17-37

연중 제6주일; 2020.2.16.; 이기우 신부

⒈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다지 춥지는 않았어도 겨울은 겨울이라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했던 계절이 지나가고 만물이 다시 생기를 되찾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격적인 우리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난의 사순절을 지내야 합니다. 2월 26일부터 4월 4일까지, 그러니까 대략 3월 한 달 여의 사순시기를 지내고 나면, 4월 5일부터 5월 31일까지 대략 4월과 5월 두 달 동안에 부활시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시기가 진짜 봄다운 봄입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그 시기동안에 숨어있던 연중시기가 다시 나타나지요. 그래서 오늘 연중 제6주일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순시기의 고난이라는 주제와 부활시기의 기쁨이라는 주제를 미리 내다보며 준비하자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들이 있는데, 그 고비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 주는 길잡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시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능가해야 할까요? 

 

⒉ 한 해의 전례력의 절정은 부활절이고 이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사순시기이므로, 지금처럼 사순시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연중시기의 초반부에는 다가오는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를 미리 내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제1독서인 집회서 15장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요구받고 있는 선택을 상기하라고 재촉합니다. 우리는 거저 생명을 부여받았지만 인생은 살든지 죽든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무조건 살아야 합니다. 생명은 한자의 뜻 그대로 삶이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세에서 그 생명을 다 살고난 후에 닥치는 영적인 운명은 온전히 우리가 한평생 사는 동안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가 지금 여기서 자유로이 내리는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물론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선택한 후에 남은 우리네 삶의 질도, 그 결도 영원한 죽음을 선택한 후와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⒊ 제2독서인 코린토 전서 2장의 말씀은 제1독서의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즉, 영원한 운명에 대한 선택은 우리에게 아직 남은 현세적 삶의 질과 결을 좌우함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외면하고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양, 그리고 그 세상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바보들이 엄청나게 많은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그 일깨움의 열쇠가 되는 문장 하나를 고르라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⒋ 사도 바오로가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었다고 알려주는 이것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동양에는 오래 전부터 불가와 유가의 구도자들이 나름대로 심오한 구도 전통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경전으로나 정신전통으로 전해준 바 있습니다. 우선 불가의 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합천 해인사에는 우리나라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천 년 가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불교 경전이 팔만 개나 된다는 뜻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긴 목판의 숫자가 팔만 개에 이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로 정확한 목판 개수는 81,258개입니다. 이 많은 경판을 다시 고려의 승려들은 목판 크기로 종이에 먼저 쓰고는 이 글씨를 뒤집어서 나무에 붙입니다. 이 나무들도 산벚나무, 돌배나무 등 천천히 자라서 강도가 센 나무들을 베어서 1년 동안 자연 상태에 두었다가 바닷물이나 소금물에 찌면 소금기가 나무에 골고루 배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수분에 의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하여, A3 크기 정도 되는 4·6배판 이상의 크기로 자른 판형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면 목수들은 뒤집혀 쓰여진 그 한문의 한자들을 거꾸로 새기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긴 글자 수가 5,200만 자라고 하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고려 중기에 이런 대규모 불사(佛事)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꺼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드리는 이같은 정성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해 보려던 불심(佛心)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경전의 수는 이보다 적은데, 지금까지 보존되어온 불교 경전은 고려대장경이라 부르는 1514개의 경전입니다. 본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원시 불교의 경전은 분류 기준에 따라 다섯 개 또는 여덟 개였는데, 고대 인도에서 쓰이던 언어가 중국에 전래되어 한문으로 번역되고 연구되는 과정에서 많이 불어났다가 다시 고려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늘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경전은 화엄경(華嚴經)과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법화경(法華經)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 경전들이 전해주는 바,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지혜는 현세의 본질이 고통이고 이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본질이 비어있거나 원래 없는 것이라는 공(空) 또는 무(無)입니다. 그래서 이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모든 욕심을 버리며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걸어가면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명 윤회(輪廻)의 고리에서 해방되는 해탈(解脫)의 경지에 들게 되고 이것이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불가에서는 설명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으로서 이같은 깨달음의 길을 가셨던 싯달타 역시 성현이시기는 하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는 공(空)이라든가 무(無)라든가 하는 결론 이외에는 달리 전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⒌ 불가의 가르침이 오랜 옛날부터 인더스강 유역에 생겨난 문명 덕분에 모여 살게 된 사람들이 현세의 욕망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생겨났다면, 유가의 가르침은 황하 유역에 생겨난 문명 덕분에 모여 살게 된 사람들이 힘을 내세운 자들에 의해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능가하는 도덕을 설파하여 질서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고대 중국에는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와 같은 철학자들이 활약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생각을 유가사상(儒家思想)이라 하고, 노자와 장자의 생각을 도가사상(道家思想)이라 합니다. 여기서 ‘유가’란 말은 선비 유(儒)자를 쓴 데에서 나타나듯이 공자의 사상을 따르는 선비들이라는 뜻이고, ‘도가’라는 말은 길 도(道)를 쓴 데에서 나타나듯이 노자의 사상을 따르는 구도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유가사상의 뼈대는 삼강오륜(三綱五倫)입니다. 삼강이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서, 임금은 신하의, 아버지는 자식의, 지아비는 지어미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륜이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리고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하며,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삼강오륜이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질서인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 덕행 즉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추구합니다. 

 

이 유가사상은 지난 이천 년 이상 동안 중국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 같은 한자문화권 지방에서 국가와 사회의 질서로서 인간관계의 규범과 덕행을 정교하게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정치적인 차별과 경제적인 불평등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유가적 사고방식은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크게 지배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의리와 예의입니다. 이 가치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유가사상이 한자문화권의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동안 이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생각해 낸 도가사상(道家思想)입니다. 이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단어가 무위자연(無爲自然)입니다. 자연의 뜻을 따르되 이에 어긋나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유가적인 신분이나 이로 인한 차별은 자연의 뜻이 아니라는 강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도가에서는 유가처럼 인의예지신을 인위적으로 수양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보지 않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태어나면서 받은 자연적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으뜸이라고 보았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유가적 규범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를 규범으로 만들면 이를 감독하는 신분에 놓인 사람들에 의해서 이른바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억압을 당할 수 있다고 보는 거지요. 이보다는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서 어린 아이처럼 소박하게 사는 것이 본래의 인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장자는 ‘나비 이야기’에서 인생과 세상 자체가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는 일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나비 이야기’란 어느 나른한 봄날에 장자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깨어 보니 ‘내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나로 변해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먹고 살자고 아둥바둥 대면서 때로는 남을 속이기도 하고 짓밟기도 하면서 적당히 죄를 짓고 살아가는 속물들을 비웃는 생각으로는 통쾌하지 않으십니까? 

 

이처럼 도가사상은 유가사상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데 대한 비판으로 출현하여 지식인들이나 민중의 생각으로 자리잡고 인생의 여유와 세상을 살아가는 자유를 높이 보았으나, 세상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현실도피적인 경향으로 흐르기도 했습니다.

 

유가와 도가를 합하여 중국의 구도자들이 전해주는 지혜는 서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점은 현세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 점이 현세에 대한 온갖 집착을 버리라는 불가의 가르침과 다르다면 다른 점입니다. 하지만 동양의 불가, 유가, 도가 등 심오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지혜들에 비해서 그리스도교가 전해주는 지혜는 사도 바오로가 확인해 준 바대로, 역사에서 감추어졌지만 신비로운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의 반열이 다른 것이지요. 

다만 하느님의 지혜를 받들어야 할 우리로서는 명심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위선자들이라는 비판을 듣던 바리사이파들이 비록 형식적이나마 율법을 지키려고 기울인 노력에 빗대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불가와 유가의 구도자들이 전해주는 구도의 정성에서 배우는 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상을 당하면 3년씩 일상을 중단하고서라도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고자 했던 유가 선비들의 정성이나, 새벽 예불을 하기 전에 백팔배를 올리며 깨어있는 의식으로 불경을 바치려는 불자들의 정성이 귀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배우려는 정성, 그분의 부활에서 얻어지는 우리 부활의 기쁨을 알아차리려는 정성이 그래서 이 시기에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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