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무신론 시대의 하느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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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 58,7-10; 1코린 2,1-5; 마태 5,13-16

연중 제5주일; 2020.2.9.; 이기우 신부

 

⒈ 연중 제5주일인 오늘,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산상설교를 시작하는 이 말씀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새로이 출발하려는 동족 이스라엘에게 전통적으로 지속되어온 단식과 같은 종교적 인습이 그저 식사 한 끼를 굶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절약된 몫의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행위로 이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인다든가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나누어주는 애덕의 실천 행위로까지 이어져야 함을 일깨워주는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의 결론은 세상 사람들이 왜 부패하기 쉬운 사람들 사이에서 소금이 되어야 하고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지를 설득하자면 먼저 모범과 표양을 보여주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⒉ 단식 행위가 종교적 인습에 따른 연례행사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산상설교의 말씀이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했던 까닭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선이 그저 인식하고 깨닫는 데서 그쳐서는 세상의 죄악을 한 치도 물러서게 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것입니다. 약하고 두려웠고 또 떨렸지만 말재주로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려는 실천만이 악에 맞서서 선을 드러낼 수 있고 진리를 증거할 수 있으며 결국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⒊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셨던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믿는 신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이래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섬겨 왔고 그 섬기는 방식으로서 율법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새로운 길을 선포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섬겨온 방식이 종교적 인습에 얽매인 나머지 정작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어서 사실상 무신론자들의 방식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회가 겉으로는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정체제였으되 속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이 당시의 열성적인 종교 지도자들과도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셨지만 더 큰 장애는 그들의 욕망을 고리로 당신과 맞서던 악령의 존재와 활약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악령의 유혹에 빠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죽일 수 있었던 명분은 역설적이게도 신성모독과 성전모독 혐의였습니다. 즉 악의 세력은 결코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며 그럴듯한 선한 명분으로 위장하여 선을 압살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미리 내다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고 사명을 부여하셨으며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알려지던 지난 2천 년의 역사에서는 물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더 많고, 하느님을 알고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마치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상황처럼 종교적 인습으로만 섬길 뿐 정작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형편이라서 더욱 그러합니다. 

 

⒋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가 저지른 죄악상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이들이 저지른 죄악상은 끔찍했고 특히 유태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 당시 나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유태인 최고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태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외로 추방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학살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는 자신의 입으로 유태인 5백만 명을 처리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였던 악인입니다. 종전 후 그는 가명을 쓰고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도피다가 체포되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워져 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사형 집행을 당하기는 했으나 재판을 받는 내내 자신의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며 발뺌을 했습니다. 그와 동갑내기로서 독일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목격했던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미국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세기의 재판을 방청하고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작품을 써서 악의 평범성, 정확하게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도피하려는 악을 고발했습니다. 

 

⒌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이였던 아이히만은 정말 평범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척 연극을 했을 뿐입니다. 아렌트가 고발하고자 했던 역사적 진실은 이렇습니다. 전체주의 체제의 악은 근대적 개인의 자유를 압도했으며 인류의 일원 내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판단 능력을 앗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악한 체제 하에서도 악은 결코 비범한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다만 인류에 대한 불법에 대해 인식과 사유의 능력을 박탈했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없애버림으로써 극도의 체제순응성과 평범성을 낳고 폭력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인종이 학살되는 끔찍한 사태를 보면서도 결과적으로 이에 동참하고 마는 무관심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악이 저질러지기 위해서는 악인들의 죄악뿐만 아니라 이를 방관하는 세력의 협조라는 매카니즘이 반드시 작동합니다. 이 방관세력은 평범한 일상성 뒤에 숨어서 행해야 할 선을 모른 척하고 결과적으로 악을 기승을 부리도록 방치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먹고사니즘’에로의 도피 현상입니다. 우리가 손쉽게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해지는 동안에 악은 그 무관심의 자양분을 먹고 거대한 괴물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이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을 외면함으로써 악에 동참하는 능동적 선택입니다. 

 

⒎ 예수님께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실천적인 사례로 드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선을 율법으로까지 강제하는 질서 속에서 살던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해 죽어가던 이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들이 악해서였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제사 시간이 임박한 나머지 바빠서 지나쳤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당부하신  말씀은 그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세상 사람들이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지을 만큼 매우 중대한 기준입니다. 

 

⒏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전해주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도 말고 그 상을 새기지도 말라고 엄하게 금지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실을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실 수 있고 세상의 죄악을 물러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이 당신의 뜻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라시고, 하느님과 대적하려는 악마는 이에 맞서 방해하려고 책동하고 있으며, 그 악마의 책동의 빌미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인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인습적이고 일상적인 욕망의 현실 속에서 악마의 꼬임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거듭거듭 새로이 깨닫는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⒐ 이 실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습적인 종교와 깨어있는 신앙이 구분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우주가 숨어 있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선행일지언정 그 일을 진정성 있게 행함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작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실 신앙으로 이어져야 할 종교의 기본질서에는 거룩함을 뜻하는 성성(聖性)만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라는 뜻의 성성(誠性)도 있습니다. 결국 양심도 실력입니다. 실천도 실력입니다. 양심을 깨어있게 하지 않고 무디어진 채로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리게 되면 그 평범한 무관심의 자양분을 먹고 약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죄악이 무섭게 자라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⒑ 우리 사회의 정치인, 법조인, 기업인 그리고 언론인들 가운데에는 그저 개인적인 성실함에 기대고 자기 조직의 요구에만 충실할 뿐 이 양심의 실력이 낙제 수준인 인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이 저지르는 패악질이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깨어있는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못 본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힘은 보이지 않게 구석구석에서 개미처럼 일하면서 썩지 않도록 소금 노릇을 하는 숨은 의인들과, 거창하게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자기 자리에서 작아 보이는 일상적 선행에 마치 우주 안에서 지구를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는 숨은 의인들이 어둠을 비추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추려 들려드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한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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