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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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 8,23ㄷ-9,3; 1코린 1,10-13.17; 마태 4,12-23

연중 제3주일; 2020.1.26.; 이기우 신부

 

⒈ 연중 제3주일인 오늘 우리가 참조해야 할 지향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2003년부터 매년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정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도와온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올해부터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 말씀 주일’로 선언한 데 따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향을 합하여,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 말씀을 전해 받은 가난한 이들이 다시 말씀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는지의 경로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⒉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통용되어 왔습니다. 첫째는 긴급 구호입니다. 원래는 가난하지 않았던 이들이 수해나 화재나 지진 등 예상치도 못했고 막을 수도 없었던 재난을 당하면 갑자기 졸지에 가난해집니다. 세입자들이 당하던 강제철거도 이에 속했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는 그때만 도와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때마다 실시하는 이차 헌금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⒊ 그런데 한 번만 도와주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지니고 있어서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 없는 이들이 그러하고, 여러 가지 사연으로 부모가 없이 아이들끼리만 사는 소년소녀 가정이라든지, 늙어서 혼자 사는 독거노인 가정 등이 또한 그러합니다. 이런 이들은 지속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난이 초래된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좁은 의미의 사회복지 활동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노동력도 있고 가정도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딱한 사정으로 경제생활을 번듯하게 할 수 없어서 가난한 이들도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둘째 방식부터는 개인 차원이나 본당 차원의 도움만으로는 어렵고 교구 차원의 사회복지 활동이나 사회복지 시설을 통해서 도와야 합니다. 

 

⒋ 그런데 이 두 번째 방식은 돕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서 일방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일방적인 도움만 받아서는 그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어렵고 더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방식은 공동체 운동으로 나타납니다.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노동력도 있고, 또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80년대와 90년대에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의 위협을 받았던 세입자 철거민들도 여기에 해당되었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시적이거나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법률에서도 보장하는 조직화 사업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자각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직도 만들고 유관 기관에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들을 알리고 고용주 및 고용정책 당국과도 협상을 함으로써 이들이 문제가 사회의 힘과 정부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조적으로 전개되는 이 공동체적인 방식은 사회개발 내지 인간개발 활동이라고 부릅니다. 

 

⒌ 그런데 이 세 가지 방식의 공통점은 모두 사후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무릇 가난이란 사회병리 현상이어서, 모든 병이 사후 치료도 중요하지만 사전 예방이 더 중요하듯이, 가난의 문제 역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네 번째 방식은 가난한 이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조건을 다루는 법률의 제정 및 개정을 포함한 입법운동과 이들의 고용 문제를 다루는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감시운동, 더 나아가서는 이 운동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양심과 의식을 환기시키는 계몽운동과 이 운동을 나서서 실천하는 시민사회단체를 후원하는 기부운동 등이 두루 포함된 사회운동입니다. 

 

⒍ 필요한 것은 이렇듯 네 가지 방식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의 실천이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말씀의 선포로써 이루어져 한다는 균형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빵도 나누셨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바 즉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두려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현실 안에 감추어져 있는 파스카의 의미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물질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의 실천 활동 속에 담긴 의미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도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빵도 나누어주시고 마음을 열어 당신 고난과 부활의 의미도 깨닫게 해 주셨지만, 장차 믿는 이들에 의해서 무수히 이루어질 더 많은 그 사랑의 실천 행동에 담긴 의미도 보편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려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 주일의 제정 취지는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해 알려는 노력과 함께 성경에 담긴 이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 신비와 섭리를 체험하고 구현시키자는 뜻이 첫 번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주시지 않으면 근본주의적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많은 자비의 행동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이끌려지도록 함으로써 역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 신비와 섭리를 체험하고 구현시키자는 뜻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의 문자와 자비의 행동이 성령 안에서 만나야 말씀이 사람이 되실 수 있고, 그 신비와 섭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널리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⒎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돈을 나누어주는 경제적인 행위로만 국한시킬 수도 없지만, 성경 지식을 전하는 종교적인 활동으로만 국한시켜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 제자들과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필요한 도움과 사랑을 베풀어줄 뿐만 아니라 모든 방식을 경우에 맞게 고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일시적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게는 긴급 구호를,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회복지를, 인격적인 상호적인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게는 공동체 운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을 상대로 해서는 법률과 정책과 양심을 비추는 사회운동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해야 할 필요가 그래서 나옵니다. 

 

⒏ 오늘 복음의 본문이 알려주는 바와 같이, 처음에 혼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선포 과정에서 제자들을 얻으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가난한 어부들이었고, 장차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필요한 도움과 사랑으로 전하는 복음선포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꾼을 보내주시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이른바 성소자 확보와 모집은 그 목표만으로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말씀과 선교에 대한 의식의 계몽이 이루어져야 하는 동시에, 우리 교회가 추진하는 모든 복음선포 활동에 성소자를 의식하고 배려하는 일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일 추진 따로, 사람 모집 따로가 아니라,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추진하면서 그 일에 필요한 일꾼들이 자연스럽게 부르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일하십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와 유럽의 복음화를 위해 일할 인재로 필요하셔서 부르신 일꾼입니다. 사도 바오로 또한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제자인 루카와 디모테오, 티토 같은 일꾼들을 얻었습니다. 

 

⒐ 오늘을 ‘하느님 말씀 주일’로 제정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지는 작년 9월 30일에 맞이했던 성 예로니모의 축일의 뜻을 기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를 그나마 그 당시 로마화되어 가던 세상에서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라틴어로 번역하여 성서를 성경으로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에 선종 1600년을 맞이해서 그런지 작년 이 성인의 기념일에 특별한 영감을 받은 듯 합니다. 특히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마치면서,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해서 그 주일을 온전히 하느님 말씀에 바침으로써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던 기억을 상기하고 예로니모 성인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 말씀 주일’로 정하기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듯 합니다. 

 

⒑ 덧붙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것은 사제들의 강론입니다.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게 하자면 독서와 복음을 해설하는 강론이 또 하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또 하나의 성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그네처럼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시고 말씀에 대한 이해를 살아있게 해 주신 것처럼, 그러자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해 주신 것처럼, 오늘날 미사 중에 말씀을 풀이하는 사제의 강론도 이를 듣는 신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어 필요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귀에 들려올 뿐인, 그래서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들어줄 만한 알맹이가 담긴 사람의 말이어야 하고,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원리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렇게 되면 강론도 또 하나의 성사처럼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은 타볼산에서 일어난 거룩한 변모 사건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는 눈이 뜨이고 자신도 거룩하게 변화되고 싶을 정도로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가 열리는 또 하나의 기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그래서 강론은 늘 긴장스럽고 조심스러운 사제들의 십자가입니다. 신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떡밥도, 미끼도, 그물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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