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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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 ⓶ 성덕과 의덕으로 통공하는 교회

이사 49,3.5-6; 1코린 1,1-3; 요한 1,29-34

연중 제2주일; 2020.1.19.; 이기우 신부

⒈ 초대교회 시절에 코린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아퀼라와 프리스카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황제가 내린 유다인 추방령에 따라 코린토로 흘러 들어왔는데, 천막을 만드는 같은 일을 하다가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군인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쟁이 흔했던 로마시대에는 천막의 수요도 많았습니다. 아퀼라는 원래 소아시아의 흑해 부근 본도 출신인데 로마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일솜씨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직업이 같았던 그 부부와 함께 일하면서 자신이 전하던 복음을 들려주었고 곧 그 부부는 바오로의 제자 겸 선교사 동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오로는 아무래도 그 당시 이탈리아의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었고 또 소아시아의 중심지로서 번영하고 있었던 에페소로 다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이 무렵 바오로가 떠난 코린토로  들어온 사람이 아폴로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그는 열심히 자기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고 다녔는데, 아폴로의 설교를 유심히 듣던 그 부부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바오로에게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아폴로에게 한 수 더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한 수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아폴로가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부부는 예수의 세례를 알려주었습니다.”

 

⒉ 요한의 세례는 물의 세례요 죄로부터 회개하는 정의 구현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세례는 불의 세례이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랑 실천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도 죄를 짓게 하는 악의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박해를 견뎌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지만, 예수의 세례도 죄를 짓게 하는 악의 세력에 흔들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요한의 세례에서도 올바른 양심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예수의 세례에서는 더욱 성령께서 이끄시는 믿음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 

 

  요한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늘그막에 기도해서 낳은 아기였고 이 귀한 아기가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졌음을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를 찾아와서 알려준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하느님의 개입으로 탄생하셨는데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으셨기 때문이고, 이 사실을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과 정혼한 직후 마리아를 찾아와서 알려주었습니다. 다 같은 하느님의 개입이었으나, 요한은 예수님을 위한 존재로서 태어났고 예수님은 요한의 준비 위에서 하늘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탄생 과정에서 똑같이 하느님께서 개입하셨지만 준비와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다르게 개입하셨던 것처럼, 활동 과정에서도 요한에게는 회개를 외치고 물의 세례를 베풀며 헤로데와 같은 악의 세력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가 주어졌지만 예수님께는 불의 세례를 베풀며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가 주어졌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⒊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이 불의 세례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스승의 옆자리에 앉고 싶어 했을 때 예수님께서 걱정스럽게 권하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당신 자신도 힘겨워하셨지만 제자들에게 짊어지어주시기도 어려워하셨던 이 불의 세례는 십자가의 세례이기도 했으므로, 무려 세 번이나 거듭거듭 예수님께서는 예고하셨고 또 당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부활과 함께 예고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은 부활에도 참여합니다. 그래서 물의 세례와 달리, 불의 세례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성령의 세례요 그 사랑을 실천하느라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십자가의 세례인가 하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으로 부활하는 세례이기도 합니다. 

 

⒋ 교회는 물과 불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따라서,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그분의 지상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예비자로 받아들이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세례성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성사를 거행하는 재료는 죄를 씻는 물이며, 그로써 받게 되는 은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영혼에 그리스도의 인호(印號)가 새겨진 존재로서 세상과 구분되는 은총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를 은총의 지위라고 합니다. 동방의 정교회 신자든, 서방의 가톨릭교회 신자든, 개신교파의 신자든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기껏 단 한 번, 그것도 물에 씻김을 받았을 뿐인데도 그제까지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과분한 보상입니다. 세례 예식을 받기까지 준비과정으로 6개월 정도의 교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약속어음을 발행하는 일과도 비슷해서, 세례를 받기까지 들인 노력보다는 세례 이후 예수님을 본받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실천 노력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의 가치가 그토록 크고 위대하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후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냉담하는 경우는 약속어음에 따른 대금을 지불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그 어음종이를 한낱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부도 행위와 같습니다. 

 

⒌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 마주 서는 이 세례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그러나 세상의 죄에 물들어가는 이 세상을 다시 당신의 나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래로 하늘이 열렸고 하느님께서 성령의 기운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 사건이 하느님께 대해서 지닌 영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세례가 지닌 교회적 의미는 좀더 복잡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는 동방 교회든 서방 교회든, 가톨릭 교파든 개신교 교파든, 교회의 구체적인 집단에 소속된 일원으로서 받기 때문이고, 그로써 그 집단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는 다른 여섯 성사를 받을 자격을 얻는 입문성사로 인정합니다. 동방 정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사생활에 아무런 장벽이 없이 통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파에서는 성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효한 세례를 받은 개신교파 소속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서방 교회에서 성사생활을 하려면,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하려면 성사에 대한 교리를 비롯하여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나서 개종 선언을 해야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의 사실상 초점이 되고 있는 가톨릭-개신교 간의 관계에 있어서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역사과정을 대화로 풀어가다 보면 알 수 있듯이 성사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며 개신교파 그리스도인들이 성사를 인정하고 돌아와야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그 다음 세례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하느님의 뜻과 달리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무시당하고 소외된 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절반 가까이나 되는 현실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당시에 한국에 경제 원조를 제공한 국제금융기구가 요구했던 이른바 노동의 유연성 조치는 분명 외환 위기가 극복되기까지에 필요했던 한시적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스런 기업가 집단과 관료주의에 젖은 정부의 금융 및 고용 당국자들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외환 위기가 극복된지 2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 민주화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타깝고 한심한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 사회적 약자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의인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흔히 민간 단체 또는 NGO에서 활동하는 이 의인들 가운데에는 다른 종파에 속해 있거나 아예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의롭게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중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본당에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도 냉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속한 본당의 분위기가 기복적인 차원에서 마음의 평화만을 원하는 경우에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자기 일처럼 돕고 힘쓰는 이 소수의 의인들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화세(火洗)를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이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바 있습니다. 

 

⒍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모범에 따라, 그리고 그분이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내려주시는 엄청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기도하고자 합니다. 첫째,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자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더욱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사생활에 대해서도 충실함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신 예수님을 본받는 성덕에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성사생활에 충실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의덕에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의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덕과 의덕으로 통공하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일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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