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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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 42,1-4.6-7; 사도 10,34-38; 마태 3,13-17

주님 세례 축일; 2020.1.12.;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구세주의 성탄이 공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공현이라면, 세례는 공현되신 구세주께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탄과 공현 그리고 세례를 전례에서 경축하는 흐름은 예수님의 생애를 쫓아가는 시간상으로도 자연스럽지만 그분을 구세주를 믿고 구원되기를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의미가 각별한 것입니다. 성탄이 공현으로, 다시 공현이 세례로 나아감으로써 구원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례 축일로써 성탄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에는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은 품위대로 세상에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소명이 부과됩니다. 

 

⒉ 서른 살이 되어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으로 나아가 당시 세례 운동을 벌이고 있던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보통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을 비롯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회개했습니다.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 1,5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몰려 들었을까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마실 수 있는 물은 물론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는 물이 필요합니다. 강수량이 매우 적어 기후가 건조한 그곳 지형에서도 위생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유다교에서는 이 일을 예식으로까지 승화시켰습니다. 때문에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발을 씻고 식사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도록 하는 율법 규정까지 생겨났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정결례입니다. 

당시 유다 광야에서 생활하던 에세네파 사제공동체에서는 겨울 우기 한 철에만 내리는 빗물을 저장고에 받아 놓고서는 일년 내내 하루에 한 번씩 온 몸을 씻는 정결례를 행했습니다. 생활풍습을 종교예식으로 승화시키다보니 단지 위생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가미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몸을 물로 씻음으로써 몸의 더러움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더러움까지 없애고 깨끗해지고자 하던 종교적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 정결례를 일상적으로 행하던 에세네파 사제공동체의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정결례를 행하면서도 세상의 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늘어만 갔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찾아온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쏘아붙인 말을 보면 그 정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7ㄴ-8.10). 그 정도는 덜할지언정 역시 세상의 죄에 물들었던 세리와 군인들을 비롯한 군중도 찾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그들이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고자 했던 이유는 그가 요르단 강물에서 몸을 씻으면 이제까지 저질렀던 모든 죄가 한꺼번에 없어질 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씻고 싶은 종교적 염원만 있었을 뿐 그저 관습적으로 행하던 일상적 정결례가 아니라 단 한 번의 물 씻김으로 모든 죄를 사하고 회개시킬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요한에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유다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만을 먹고 살던”(마태 3,4) 그에게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4.6)는 마태오의 묘사는 단순히 광야에서의 생활양식만이 아니라 그가 당시 군중에게 예언자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실로 수백 년만에 나타난 예언자였습니다. 단 한 번의 물 씻김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인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세례받기 운동이라고 불릴 만큼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고 그는 세례자라고 불리었습니다. 

 

이 세례운동에 대한 소문은 갈릴래아까지 퍼졌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태중에서 만났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조우를 하게 되었는데, 요한이 태중에서 알아보았듯이 군중 틈에 끼여 계시던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는다는 뜻이지만 세례를 베푸는 사람을 정신적 인도자 즉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도 들어 있기에 요한은 기겁을 하고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도록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뜻이란 장차 믿고자 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모범을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직접,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이 이 대목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들었는데 오직 예수님께서만 이 말씀을 들으셨다고 전하고 있는 것은 그분께서 내면의 자각으로 이 큰 깨달음에 이르셨다는 뜻입니다. 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복음사가는, 하늘이 열렸고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썼습니다. 이로써 세례사건의 영적 의미가 밝혀졌는데, 세례 이후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 행보가 하늘의 삶이요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의미는 첫째,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이심을 자각했다는 것, 둘째 하늘이 열렸다는 것, 셋째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⒋ 이러한 세 가지 의미에 따라서 본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우리의 삶도 하늘의 삶으로 열어주는 것이요 우리의 일 역시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도록 하는 거룩한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예수님께서도 체험하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구세주의 존재가 공적으로 드러난다는 공현의 사전적인 의미에 따라 보자면, 동방박사들이나 노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 같은 제3자들이 구세주를 알아보고 경배하거나 축복하거나 경의를 표함으로써 세상에 대하여 구세주를 알린 사건들을 들 수 있는데, 교회의 성무일도에서는 공현의 구원적 의미를 더 강조하는 뜻에서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조배 사건, 카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기적사건, 그리고 오늘 미사가 경축하는 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린 사건을 들기도 합니다. 이는 그냥 예수님의 존재나 신원만이 아니라 구원능력에 더 초점을 둔 관점으로서, 외적으로 나타난 공현의 양상보다 공현의 본질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보자면, 그분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이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자각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 이 사건이 공현사건인 첫 번째 이유가 됩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품위에 걸맞게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알려지시고 어두웠던 세상이 밝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세례명은 그래서 받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새로 태어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 점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본이 하느님이라는 자각이 인간이 지닌 신성을 상기시켜 주고 인성의 품위도 높여줍니다. 귀하디 귀하다는 깨달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5.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세례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성사는 견진성사와 성체성사와 함께 성사생활을 할 수 있게 주는 입문성사로서의 성격을 지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늘의 생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자부심, 그 인생길에 하늘이 열려있다는 축복의 긍지,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안도감이 은총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현 주간 내내 이에 관한 사도 요한의 메시지에서 강조해 드렸다시피,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과 맞서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시 말씀드리자면 세례에는 종교적으로 귀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던 행동에도 사회적 의미가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움직이던 주요한 사회세력들은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나 젤로데파 또는 에세네파 등이 있었습니다. 보수세력을 대변했던 사두가이파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봉헌권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유지되는 한 로마세력과도 타협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보세력을 대변했던 바리사이파는 사두가이파와는 달리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체성이 보전되기를 희구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고 해석하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내세워 민중 위에 군림하며 경제적 기득권을 누리던 지식권력이었습니다. 혁명세력을 대변하는 젤로데파는 이들 두 세력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들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갈릴래아 출신들로서 로마에 대항하여 무장봉기를 꿈꾸던 민중이었습니다. 이들 세 세력이 모두 성경에 언급되지만 에세네파는 성경에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은둔하며 살던 독신사제그룹이었는데, 본시는 타락한 사두가이파 사제들에 반대하여 떨어져 나와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던 사제들이었습    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중 그 어느 세력도 선택하지 않으시고 오직 세례자 요한이 견지했던 시국관, 즉 파국이 임박했으며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하지만 요한처럼 세례운동에 동참하지는 않으시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돌보아주시고 위로해주심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공정을 펴리라”던 이사야의 예언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한 사회적 선택과 종교적 선택을 결단해야 합니다. 이 선택을 바탕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열린 하늘과 세례 이후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례받은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큰 깨달음을 오늘 얻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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