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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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이사 60,1-6; 에페 3,2.3ㄴ.5-6; 마태 2,1-12

주님 공현 대축일; 2020.1.5.; 이기우 신부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메시아의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오는 동안, 예언자들에게 먼저 계시되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을 통하여 열두 사도들에게 계시되었다가 예언자 직무와 사도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계시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 안에서 예언자직과 사도직을 통하여 진리가 계시되는 과정을 공현이라 합니다. 공현의 신비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다른 이들에 의해서 메시아로서의 신원이 공적으로 드러나신 여러 사건들을 역사적 근거로 삼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서 경배한 사건이라든지, 아기를 봉헌하러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가 아기 예수를 두고 축복한 예언이라든지, 세례자 요한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두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하며 선언한 일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공현 사건들을 원천으로 해서 교회는 예언자직과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메시아의 존재와 가르침에 대한 진리를 계속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선포해 왔습니다. 그래서 세말까지 교회가 목표로 삼는 파스카 과업은 그 자체로 본질상 공현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파스카 과업의 내면이 공현이고 공현의 외형이 파스카 과업입니다. 

 

⒉ 메시아의 신비를 알린 예언자들 가운데 이사야는 탁월한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는 동족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절망적 상황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던 이 메시지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한테서였습니다. 멜키올, 가스팔, 발타자르 등 점성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천체의 움직임에서도 뒷받침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귀한 예물을 준비하여 먼 길을 떠나 정확하게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구유를 찾아왔습니다. 이방 민족의 현자들까지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유다인 중에 태어나시는 그분이 유다인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시라는 보편성을 말해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고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태도를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⒊ 동방박사들의 여정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모든 이들도 눈여겨보아야 할 구도의 길입니다. 점성술에 밝았던 그들은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주시리라는 예언을 믿고 밤하늘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뜨자 주저없이 전 재산을 처분하여 메시아를 경배할 때 봉헌할 예물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별의 인도를 따라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은 고난과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여정이어서 마치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물도 마시고 휴식도 취하러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가려 별빛을 잃어버렸고 거기서 성서의 도움으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성서가 가리켜준 방향으로 길을 잡았을 때 다시 그 별빛을 발견할 수 있었고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가서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여정을 간추리면, 기다림-예물 준비-먼 길을 떠남-고난과 위험을 겪음-도시에서 길을 잃고 성서의 도움으로 다시 찾음-구세주를 경배함의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 복음의 본문은 다섯 째와 여섯 째 여정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⒋ 공생활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내려오시어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안에 현존하여 계십니다. 별의 인도를 따라 구세주를 경배하러 구도의 여정을 떠난 동방박사처럼, 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교회는 역사 안에서 여러 민족들의 문화를 만나며 공현의 순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루어져 온 이 순례 여정은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는 일과 그분의 신성을 인성 안에서 드러내는 일로 나누어졌습니다. 

 

⒌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공생활 동안 직접 그 복음을 들었고 또한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겪으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또한 동시에 참 인간이심을 알아보았지만,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사는 고대인들에게도 이를 믿어야 할 신앙 진리로 선포하는 일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를 견뎌야 함은 물론이요 박해가 종식된 후에도 수없이 발생한 이단들과의 논쟁을 거쳐야 했던 과정을 필요로 했습니다. 

  가장 큰 이단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면서도 신성을 거부하고 모세의 율법을 개혁하고 모범적으로 준수한 예언자로 간주한 에비온파였습니다. 유대계였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음은 물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도 구원적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에 청빈생활과 재산공유를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교 바깥 동방세계와 그리스적 사유에서 기원한 이원론에 뿌리를 두고 여러 종교들의 사상을 혼합한 영지주의 이단도 기승을 부리면서 그리스도 신앙을 위협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부인하고 신약성경만을 인정하던 그들은 매우 다양한 분파들로 그리스도교 안에 퍼져 있었지만 공통적으로는, 인간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한 나머지 구원의 이르는 앎, 즉 영지(Gnosis)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함부로 정식화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부인했으며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인격적인 변화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무시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에게 베풀던 할례를 면제한다는 결정을 내린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래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에페소 공의회 등을 거치면서, 교회는 이단들로부터 제기된 문제들을 숙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신앙 교리를 정통 노선 위에 확립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와 만난 5백 년 동안에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라는 신앙은 도전받은 적이 없었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오 참 인간이시라는 신앙과 성령께서 이 신앙의 진리성을 신자들의 신앙과 이성을 통해 보증하신다는 삼위일체 신앙을 확립하였습니다. 

 

⒍ 게르만 문화와 만난 천 년 동안에는 교회의 정통성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동방교회와의 분열 사태를 통해서는 로마의 수위권이 그리스도교 신자들 안에서 보편적으로 공인되기 위해서는 베드로로부터 내려온다는 역사적 기원만 내세워서는 어렵고 실제적으로도 베드로처럼 사랑에 입각한 실천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개신교 교파의 이탈 사태를 통해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입각하여 구원의 은총을 가시화시키는 성사를 거행함에 있어서 성사의 봉사자들인 성직자들의 자세, 즉 겸손과 섬김과 관용의 태도가 필수적임을 깨닫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성사의 사효성만이 아니라 인효성도 중요하다는 당연한 이치를 매우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운 셈이지요. 

 

⒎ 근세 이후 지금까지는 어느 특정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초래된 자본주의 사조와 이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사조가 격돌하는 역사 안에서 물질문명의 세계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가운데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인 도전을 교회가 받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교회를 에워싸고 있어서 믿는 이들보다 믿지 않는 이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정통 교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깨닫고 교회는 정통 교리 위에 정통 실천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가톨릭 사회교리를 반포하는 한편 근본적인 쇄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이단들이 정통 교리를 확립하는 데 반면교사의 기능을 수행한 것처럼, 인권선언과 그 후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인간 존엄성 회복 운동은 그 무신론적인 기조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정통 실천의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게 촉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던 것처럼, 교회도 물질을 숭배하는 대신 하느님을 섬기고 귀족과 부자와 식자 등 가진 자들을 우대하는 대신 신분이나 재물이나 지식 등 힘이 될 수 있는 것을 가지지 못한 보통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함을 깨달았으며, 이로써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교회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에서 증거해야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⒏ 이것이 교회가 네 번째 동방박사로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공적으로 알아보게 하기 위하여 그분을 드러냄으로써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공현의 여정입니다. 이 공현의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메시지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넓은 스펙트럼을 차지하게 된 이 메시지들은 시대마다 표현을 달리하여 메시아를 알아보게끔 선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은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그분의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알아보도록 이끄신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로 하여금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도록 인도해 주시도록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서 일체이시라는 신앙 고백 정식을 확립하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주춧돌 삼아 세워진 교회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서 성체성사를 거행해 오고 있는데,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주관하시는 성령께서 그분의 현존을 담아 신자들에게 전달해주심으로써 거룩하게 변화된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메시아적 백성이 되어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이 모든 메시지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메시아를 공현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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