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유다인들의 임금? 세상을 섬기러 오신 하느님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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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유다인들의 임금? 세상을 섬기러 오신 하느님의 종!

 

2사무 5,1-3; 콜로 1,12-20; 루카 23,35ㄴ-43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2019.11.24.; 이기우 신부

 

1. 전례력으로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전례상으로 볼 때, 그리스도왕 대축일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연중시기의 전례적 특성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시기이고 그 활동은 결국 그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함으로 귀결되기에 이 연중시기의 마지막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2. 둘째, 대림성탄시기과 사순부활시기라는 고유시기에 예수님의 일생에 담긴 신앙의 신비를 전례로 경축하지만 유독 심판의 신비만큼은 미루어두었다가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예수님께 관해서 고백하는 신앙의 신비는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신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하에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과 죽음, 죽으신 뒤 저승에 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 부활의 신비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승천과 오십일만에 보내신 성령의 강림으로 펼쳐지다가 마지막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는다는 심판의 신비로 끝납니다. 그런데 전례력상으로는 대림과 성탄시기에 탄생을 경축하고, 사순시기에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며, 부활시기에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대축일로 경축하지만 유독 심판만은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미루어놓았던 심판의 신비를 연중시기 마지막에 기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3. 셋째, 연중시기 동안에 우리가 행한 복음선포활동을 연말결산하듯이 심판받는 기준은 봉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여기서의 ‘왕’은 세속 왕국에서 다스리는 통치자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공생활 동안 그분이 보여주신 모습은 섬기는 왕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상이 모셔져 있는 십자고상에는 어김없이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으로, ‘IESUS NAZARENUS REX IEUDAEORUM’으로 쓰여있지만, 이는 그 당시 예수님을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몰기 위하여 사두가이파 출신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관할하던 수석 사제들이 만들어낸 혐의일 뿐입니다. 그분은 결코 세속의 정치적인 의미로 백성을 억누르는 왕 노릇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백성을 보살피고 섬기는 종 노릇을 하다가 모함을 받으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왕이란 그리스도종이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한 해 동안 얼마나 다른 이들을 섬겼는지, 즉 봉사를 잘 했는지 여부입니다. 

 

4.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한 때는 비오 11세 교황 치세였던  1925년이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종으로서 봉사하신 그리스도에 따라서 교회관의 쇄신을 가져온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1965년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를 봉사자로서의 교회로 규정하게 된 이 무렵부터 봉사적 교회관이 우리 교회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5. 그 이전까지는 교회중심적 교회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제도적 교회관에서 공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가르치고 성화하며 통치하였습니다. 복음선포적 교회관에서 교회는 세계가 겸손되이 들어야 하는 하느님의 메시지, 즉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적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적 교회관에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완전성으로 성장하는 하느님의 백성이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들 교회관 속에서 교회는 능동적 주체로 간주되는 반면에, 세계는 교회가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객체적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직접적 행위를 통하여 설립되고 하느님과 세계 사이에 중재자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계로 오고, 세계는 인간들이 교회를 믿고 가담하며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한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6. 그런데 근세 이래, 특히 계몽주의 시대 이래 세계는 점차로 능동적이며 교회에 대해 독립적인 세계가 되었습니다. 학문과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은 점점 더 세계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미래를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조절하며 형성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세계는 점점 더 인간화되고 세속화되었습니다. 이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오랫동안 만사를 포괄하던 교회의 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7. 이러한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19세기 중엽 이래로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비오 12세 등 역대 교황들은 세계와 인간의 오류에 대하여 개탄했으며, 시대에 순응하려던 현대주의 운동을 단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요한 23세가 개최하고 주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자세를 극적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인간문화, 특히 과학의 정당한 자주성을 인정하고, 교리와 제도적 구조를 포함하는 교회 자체의 쇄신을 요청하며, 현대 세속생활에서 이룩된 최신의 업적을 이용하도록 촉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인류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봉사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신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복음선포를 계승하되 인류의 일치를 촉진함으로써 세계에 봉사하도록 전환해야 한다고 천명한 것입니다. 

 

8.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구현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치료하며 화해하고 상처를 싸매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의 빈곤과 걱정에 동참하시며 이 때문에 지금도 성령으로 현존하시면서 당신의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류가 살아나도록 실제로 죽기를 각오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며, 병든 인류가 치료되도록 봉사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셨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자기 자신을 봉사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공식 입장을 전환시키는 데에는 떼이야르 드 샤르뎅과 본훼퍼 같은 신학자들이 기여를 크게 하였습니다. 

 

9. 이들 신학자들이 봉사적 교회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교회가 현대세계 안에서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너무도 자기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해 온 나머지 세계와 대화하기도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고, 신자의 수도 줄어들 뿐 아니라 세계는 세계대로 교회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나머지 하느님을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 신학자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려가는 현대세계가 오로지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기여를 더욱 필요로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에 대한 희망, 평화와 정의 그리고 형제애적 연대 등 성서적 주제와 가치에 따라 세계에 사심없이 투신하는 행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계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봉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신앙을 잊어버린 세계는 책임과 의무는 소홀히 한 채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고, 권력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데 탐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을 세계가 자신들의 목표를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히 성취하도록 돕고 봉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 이 봉사적 교회관이 20세기 중반 이후 가톨릭교회의 선교적 전망에도 커다란 희망과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인간사회를 하느님 나라를 닮아가도록 변혁시킬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봉사적 교회관에 있어서도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종이셨지 세상의 종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께 순명하셨지 세상에 순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그리스도인들의 봉사 행위가 말씀과 성사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성화될 필요가 절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봉사적 교회관은 복음선포적 교회관 및 성사적 교회관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 쇄신의 당면 목표가 있습니다. 

 

11. 말씀의 빛으로 조명을 받고 성사의 은총으로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봉사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 새롭게 요청되는 선교적 소명입니다. 더욱이 현 시기 한국사회는 지난 70년 동안 겨레를 고통스럽게 괴롭혔던 분단구도를 극복하고 남북협력을 이룩해야 할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분단구도가 일제강점기의 친일잔재 위에서 성립되었던 것이고  광복 이후 절대적인 대미의존 성향으로 흘러왔기에, 향후 한국사회의 진로는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과제와 함께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미국에 의존해 왔던 노선으로부터 좀 더 자주적으로 한미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과 북이 다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4대강국들, 즉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백 년 전과는 다르게 자주적이면서도 호혜평등한 관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면 한국사회 안에서 기왕에 벌어지고 있는 정신적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 특히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을 잡고 앞장을 서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보에 대해 무책임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물론 남북의 겨레를 포괄하는 민족 전체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사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가톨릭적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 가치를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지대인 한반도에서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구현해 내는 거룩한 과업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12.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민족과 민중을 위하여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되,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느님의 종으로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하고, 가톨릭교회의 성사가 지닌 품위를 한껏 발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그리고 각자가 부여받고 있는 소명의 몫을 하느님께 귀하게 바치는 봉헌 예물로 삼음으로써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왕께서 우리 자신에게는 물론 우리 사회와 겨레에게 정의와 평화의 상급을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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