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라자로의 경고

47

본문

라자로의 경고

 

아모 6,1ㄱㄴ-4-7; 1티모 6,11ㄱㄷ-16; 루카 16,19-31

연중 제26주일; 2019.9.29.;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하여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가르침을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바리사이들은 부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공개한 터라서 루카는 이 비판을 전제한 비유를 점잖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전제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들이 백성들에게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며 집행하기도 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지식인 행세요, 법률가 노릇이며, 판검사 흉내를 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놓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행태는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자된 이들은 눈먼 인도자들이었던 겁니다.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같은 값비싼 사치품들을 소유하면서 십일조를 내면서도,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대놓고 무시하는 범법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의를 외치는 시대의 예언자들을 가두고 괴롭히며 조롱하는 악인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검사들이 이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2. 지난 주 화요일 미사에서 강론으로 검사의 선서에 대해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만,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 받고,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로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가 되겠노라고 엄숙하게 선서를 하고 검사직을 시작합니다. 

3. 그러나 현실에서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 검사들은 법 위에 군림해 온 특권층이었습니다.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기는커녕 억울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사형을 시키기도 하고 수십 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많습니다. 이 사건들은 대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법원에서 재심을 받아 무죄로 판명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인생이 망가지고 가족이 파탄났어도 정작 그들을 죄인으로 몰았던 검사와 판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이게 대한민국의 법적인 현실입니다. 이렇게 검사들이 망가지게 된 법률적 제도의 독소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함께 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권력독점 때문입니다. 게다가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은 그 기소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소편의주의라는 권한으로 범죄를 지은 자들에게 기소를 면제해 줌으로써 거액의 뇌물을 받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합니다. 노회찬의 경우에서 보듯이, 도둑을 잡으라고 했더니 신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던 자들이 검찰이었습니다. 힘없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한없이 엄격하고 돈있고 소위 빽 있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습니다. 그래서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해 나가면 큰 죄를 지은 자들의 변호를 맡아서는 죄의 경중이나 정의와 불의의 기준에 관계없이 유리한 수사를 해 주거나 아예 기소를 면제해 주는 후배 검사들의 전관예우 덕택에 의뢰인으로부터 거액의 수임료를 챙겨서 부자가 되어온 위선자들이 검사입니다. 그러니까 국민 앞에 선서했던 말과는 정반대로 살고 처신해 온 범법자 집단인 것이지요.

4. 이렇게 오늘날의 바리사이 집단인 검사 무리들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의 청중으로 상정해 놓고 나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재물을 그릇되게 소유하고 사용한 인물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는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경고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의 자기 심판 언도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이렇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망설이는 부자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결과로는 고통스러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지옥의 고통을 덜어주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5. 이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비유에서는 여러 가지로 대조적인 일들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 부자의 사치스런 모습은 짧게, 가난한 사람의 고통은 길고 자세히 소개됩니다. 또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가난한 사람의 죽음은 짧게 소개됩니다. 죽은 후 부자의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아브라함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으로도 충분한 것 같이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시는 초점은 분명합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이 벌어져 있듯이 마치 내세의 간극처럼이나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좁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하느님의 힘을 믿는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빈부의 양극화 현상에서는 90:10에서 99:1로 그 간극이 벌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6. 날마다 좋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살아가는 부자와, 길바닥에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중한 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빌어먹어야 하는 라자로는 호화로운 저택의 대문간으로 갈라져서 살고 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그 대문을 드나들었을 텐데도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라자로는 부자가 식탁에서 손 닦는 용도로 쓰고 버린 빵 부스러기로 연명하고 있었고 개들까지 와서 그의 몸에 난 종기를 핧을 정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을 바오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빈곤의 극복이 아무리 급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 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47항). 

7. 현실 세계에서 부자는 권세가들이고 권세가들은 또한 부자입니다. 그리고 서로 혼맥을 맺어서 부와 권력을 세세대대로 연장해서 누리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자들에게 아모스 예언자는 불행하리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언자의 경고가 한국 현대 사회에서는 아직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로 남아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비유는 부유한 권세가들이 회개하고 정의롭게 처신하기를 바라셔서 나온 경고입니다. 

8. 하지만 사회악과 불의한 부에 대한 경고와 고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더 중요하고 더 기본적인 역할은 사도 바오로가 당부했듯이,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공동선과 신앙의 보루를 확고히 하는 이런 역할이 튼튼할수록 사회악과 불의한 부에 대한 고발과 경고도 힘있게 할 수 있습니다. 검사들의 조직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9. 전국 2천여 명의 검사들 가운데에서도 의롭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비리 검사나 정치 검사들보다 훨씬 더 많고, 범죄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고달픈 공무원들입니다. 그런 의로운 다수의 검사들이 검찰을 개혁하기를 바라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의 교훈은 자체 개혁은 무망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권세의 힘과 유혹이 그만큼 내려놓기 힘들고 아깝기 때문일 것이고 권한이 소수의 검사들에게 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내놓은 검찰개혁의 공약이 신임 법무장관의 노력과 의로운 검사들의 협력으로 차질없이 성공해야 합니다. 그 핵심은 검찰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기관 즉,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드는 것입니다. 

10.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이 공화국의 주권자는 국민입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공직자들은 국민의 권력이 위임한 책임을 완수해야 하고 그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권한이 제한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검찰을 권력기관으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국민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국민이 검찰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검찰이 국민을 무서워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검사들도 라자로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1. 끝으로 의로운 검사의 아이콘으로 국민이 기억하고 있는 한 검사의 글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경향신문 2019년 3월 17일자에 실렸던 칼럼입니다. 제목이, '거짓말도 보인다'입니다.

12. 저는 역사책을 즐겨 읽습니다. 역사를 통해 삶의 방향을 찾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니까요. 제가 2012년 12월 고 윤길중 과거사 재심사건 ‘담당 검사 교체 합의’를 깨고 무죄 구형을 강행했다는 검찰의 거짓 해명으로 막무가내 검사가 된 후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정당한 이의제기를 묵살한 채 권한 없이 한 상급자의 직무이전 지시를 저와의 합의로 호도하는 수뇌부의 거짓말은, 제가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며 늘 보아오던, ‘피해자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였다’는 강간범의 변명과 다를 바 없더군요. 강간범의 변소를 대개의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지만, 검찰의 거짓말은 주류 언론과 많은 사람들이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치기 운동권 검사가 되었습니다.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며 ‘오해와 손가락질을 견뎌낼 수 있는 의연함을 허락하시고,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게 하시며, 만약 달리 희망이 없다면 제가 그 희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문과 같은 기도로 견뎠습니다. 진실은 이 진흙탕에서 결국 연꽃을 피워 올리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헤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역사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고, 권력으로 가리고 호도해도 진실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다행입니다. 유권무죄의 역사는 참혹하도록 질겨 끔찍하도록 유구합니다. 자동 배당을 가장한 통합진보당 재판 배당 조작, 법원 블랙리스트 등 사법 농단 수사로 드러난 법원 내부의 참상은 검찰과 그리 다를 바 없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비판하면서도 민망함을 감출 수 없네요. 시민들의 질타는 ‘검찰은 그렇다 쳐도, 법원 너마저!’의 절망과 분노일 테니까요.

제가 보고 들은 검찰 간부들의 직권남용 행태는 더 놀랍기만 한데, 조용히 잊혀지고 있지요. 그때 그 사람들이 자신은 결백한 양 사법정의를 외치며 열심히 수사하고 검찰개혁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곁에서 보기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법을 구부려 권력에 아부할 것을 넌지시 권하는 권세가에게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 공자가 떠오릅니다. 법률가들에게 죄를 빌 하늘이 남았을까요? 권력에 영합하여 검찰권, 재판권을 마음껏 휘두르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순간순간을 모면해 온 사람들이 아직도 법원과 검찰, 심지어 정치판에서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그들에게 볕이 드는 하늘이 아직 남아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지난 ‘나는 고발한다’ 칼럼으로 지인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검이 당황스럽도록 고요하여 아직 별일 없다’고 제 안위를 걱정하는 벗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대검은 <장자>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鷄之德)을 흉내 내며 위기를 넘기려는 듯합니다. 그러나, 검찰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수사기관이지요. 사회 부조리를 파헤쳐 잘못을 엄단하면서, 정작 내부 치부에는 나무로 만든 닭을 흉내 내며 침묵한 채 시비를 가려 밝히지 않는다면, 검찰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요? 짠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대검의 비공식적인 해명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안태근 전 검사장 사건 기록에서 접한 전·현직 검사들의 숱한 거짓말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여전히 씁쓸합니다.

중국 진나라 무제가 고위 관료였던 산도를 탄핵한 이희를 칭찬하면서도 산도를 감싼 것에 대해,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정치의 근본은 형벌과 포상에 있다. 이것이 불분명하고서야 어찌 정치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만일 이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산도는 벌해야 하고, 사실과 다르다면 이희가 칭찬 받는 것이 문제다. 이러고도 어찌 준법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했습니다. 2015년 서울남부지검 사건 실체가 외부에 알려진 사실관계와 같다면 당시 감찰 담당자들을 직무유기로 입건치 아니한 현 검찰총장 등은 검사 자격이 없는 것이고, 잘못 알려진 것이라면, 해명해야 합니다. 의혹을 해소하지 않고서야 검찰총장이 준법을 말한들 어찌 무게가 있겠으며, 검찰개혁 논의에서 새어나오는 대검의 불협화음이 조직이기주의에서 나온 발로가 아니냐는 의심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요?

권력은 진실을 잠시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지요. 검찰은, 법률가들은, 또한 모든 공직자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시민들을 더 이상 속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도 이젠 다 보이니까요.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임은정>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