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자기 소유를 봉헌하는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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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자기 소유를 봉헌하는 십자가

-합리적 사유와 계시적 신앙-

 

지혜 9,13-18; 필레 9ㄴ-10.12-17; 루카 14,25-33

연중 제23주일; 2019.9.8.; 이기우 신부

 

1. 오늘 제1독서에서는 지혜서 9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혜서는 기원 전 1세기 경에 헬레니즘 문화권의 디아스포라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히브리어를 배우지 못하고 그리스어만 쓰는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유다교가 보전해온 하느님 신앙을 전해주기 위해 그리스어로 쓰여진 지혜문학의 하나입니다. 유다 민족이 전수해 내려온 지혜를 집대성하여 솔로몬의 이름으로 구약의 전통과 하느님 신앙을 전해주고자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적 사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유다 사상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2. 오늘 들은 지혜서 독서의 내용은 우리 신앙 선조들이 유학과 불교 그리고 천주학의 내용을 두루 섭렵한 끝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자 결심하게 된 배경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느님 신앙을 합리적 사유로 표현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우리들도 받아들이기가 쉬워 보입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인격적인 하느님 신앙은 이를 세상에 사람으로 강생하셔서 계시해 주신 구세주와 구세주께서 보내신 성령을 합한, 삼위일체의 하느님 신앙으로 수용되게 되었습니다. 

 

3.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 14장의 비유적 가르침도 예수님께서 합리적 신앙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와 태어난 후 받은 모든 조건들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입니다. 태어날 때 받은 육신의 조건들은 물론이요, 태어난 후에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한 지식이나 재산, 경험이나 깨달음 등의 조건들도 그 노력의 근원이 하느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니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를 하느님의 뜻대로 써야 한다는 합리적 사유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쓴다면 이는 근원을 무시한 처사로서 그 은총을 끝내 저버리고 마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 쓴다면 이는 근원에 따른 합리적 처사로서 그 은총을 본질대로 쓰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를 봉헌이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이것이 자기 소유를 버리는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4. 이러한 가르침이 다음 말씀에 녹아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소유를 버리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일이요, 그 돌려드리는 봉헌이 십자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래의 질서대로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온 비유가 탑을 세우는 공사와 전투에 임하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5. 탑을 비롯한 건축물을 세우려면 계획을 세워야 하고 방법을 갖추어야 합니다. 측량도 해야 하고 지질조사도 해야 하며, 어떠한 재료가 필요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과 비용과 인원 등을 사용하여 어떤 방법으로 공사할 지를 미리 숙고해야 합니다.  건축물을 다 지었을 때에도 사람들이 이용하는 데 필요한 조치들을 갖추는 마감공사가 필요합니다. 또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최상의 승리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전쟁 이전에 전쟁을 일으킬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하고, 전쟁을 결심했다면 전쟁의 명확한 목표와 그로 인한 이득이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전력과 아군의 전력을 파악하여 승산이 있는지를 먼저 보고, 직접 군사력을 전개하기 전에 계략으로 싸우지 않거나 상대방을 무력화시켜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다면 최대한 빠르고 피해 없는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 손자병법의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탑을 세우는 공사를 하거나 전시에 전투를 할 때 다 같이 필요한 일은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절차는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합리적으로 설정된 우선순위에 따르는 일입니다. 

 

6. 이 두 가지 비유를 풀이하자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이성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인생을 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라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현세 생활을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의 능력을 활용하여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7. 이렇게 해서 각 개인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도 매우 다양할 수 있고, 한 사회가 이룩해야 할 공동선의 질서도 아주 다양할 수 있습니다. 혹시 종교적 편견에 젖은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최고선을 전달하는 종교의 권고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길이나 사회의 질서는 천편일률적이고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같아도 도중에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라면 더욱 그러하고 망망대해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천지에서 하느님을 믿고 인생을 살아가고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더욱 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옳고 건전한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풍요롭고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더라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책임과 자유에 따라서 영위하려는 인생이나 또는 최고선 가치의 바탕 위에 사람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이룩하는 공동선 질서 역시 얼마든지 다양하면서도 풍요롭고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8.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훨씬 더 가능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상상하지도 못한 채 최소한의 기준을 겨우 넘나들면서 연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회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목표가 아니라 기본인데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세력 부역자들은 기를 쓰고 이를 반대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평등을 지향하는 일은 비단 사회주의적 가치가 아니더라도 최고선의 가치인 평등에서 나와야 하는 기본적인 공동선 질서인데 우리 사회 엘리트들은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에 바빠서 사회의 목표로 세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 즉 빨갱이들의 이념이라고 폄훼하면서 핏대를 올리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밑바닥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현주소인 겁니다.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실 중의 하나입니다. 

 

9. 우리보다 먼저 사회 문물과 공동선 질서를 근대화시킨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하나같지 않고 다양합니다. 서유럽과 북유럽이 다르고 미국과도 다릅니다. 어느 한 사례가 진리일 수 없고 그 나라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독재에 시달리는 지난 70년 세월을 겪었으니 이제는 새 나라의 질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공론의 장을 열 때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신앙의 지혜를 활용해서 자유와 평등과 사랑 같은 최고선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고 더 진리에 가깝고 더 정의로우며 더 평화로울 수 있는 공동선의 질서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10. 파스카 과업의 사명을 담고 있는 이런 대의(大義)를 위해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부여받은 은총들, 건강과 지식, 재산과 지위 그리고 경험과 재능 등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소유를 그리스도를 위해, 파스카 과업이라는 대의를 위해 버리는 일입니다. 사실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는 것이지요. 이기적으로, 그러니까 남을 위해 쓰라고 받은 것을 자기만을 위해서 쓰지 말라는 말씀일 뿐입니다. 사실 가톨릭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미 그런 인생,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잘 드러내지 않아서 잘 모를 뿐이지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더욱 일반화되고 장려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직이 본당이나 교구 안에서 주관하는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사회 속에서 일반의 선한 이들과 함께 공동선을 위하여 자기 재능과 시간을 기부하는 활동이 더욱 늘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사도직입니다. 워낙 최고선이 묻히고 공동선 의식이 소홀히 취급되다보니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적 상상력이 위축되어 잔뜩 움츠러들어버린 사정이 있습니다만,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개인에게나 사회에서나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다양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 고답적이고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떨쳐버리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복음적 상상력을 펼쳐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사회사도직 활동으로 최고선과 공동선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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