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평화와 구원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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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평화와 구원의 깃발

 

예레 38,4-6.8-10; 히브 12,1-4; 루카 12,49-53

연중 제20주일; 2019.8.18.;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이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을 가진 자들이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에 대한 사람들의 자각을 억누르고 억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들면 세상에 거짓 평화가 가득차게 됩니다. 사랑과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불을 질러서 평화로 위장된 이 위선적 상태를 깨뜨리고 참된 평화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이를 위한 희생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그분은 밝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불의 세례’는 십자가의 세례로 불리우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한 물의 세례를 받은 당신 제자들과 우리들에게도 불의 세례를 권유하는 평화의 깃발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십자가의 세례를 받아야 이 세상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앞당겨지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밝히신 구원의 깃발이었던 겁니다.  

 

2. 유다왕국과 백성을 위해 구원의 깃발을 들었던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경에 남유다왕국에서 활약했던 예레미야가 그 기수였습니다. 당시 남유다왕국도 신흥 강대국 바빌로니아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왕국의 왕과 신하들은 이집트제국의 힘에 기대어 바빌로니아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에게 위협을 받거나 기대고 있으면서도 유다왕국의 내부는 엉망이었으니 권력이 심하게 부패한 탓으로 백성들의 공동선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자신들은 시온 언덕에 세워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계약의 궤를 모시고 있는데다가 하느님께서 다윗과 그의 왕조를 축복해 주신 시온 계약 덕분에 유다왕국은 무사하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지도층과 백성의 죄악 때문에 유다는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깨어있는 삶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바빌로니아의 힘에 밀려 항복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회개하는 삶을 살면 하느님께서 다시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새로운 공동체에서 희망찬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고 20여 년 동안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권력층의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했고 결국 왕국은 기원전 587년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빌론에 유배당한 그의 제자들이 그의 예언이 참된 하느님 말씀이었음을 깨닫고는 예언서로 기록하여 후대에 남겨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외로웠던 예레미야의 깃발은 후대에 이르러서야 유다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깃발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따라서 믿는 이들도 이 세례를 받도록 촉구하는 메시지가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와 구원을 누릴 수 있도록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불의 세례를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믿음의 영도자가 되셨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펼쳐 보이시어 믿는 이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그 증인이 되어 믿는 이들을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켜드신 구원의 깃발을 따라서 믿는 이들도 성령의 세례를 받자는 뜻입니다. 이 깃발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들어야 하는 교회의 깃발입니다. 

 

4. 올해가 3·1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을 맞이하는 해인데, 우리는 바로 지난 목요일에 광복 74주년을 지내면서 대한민국 백주년을 다시 한 번 경축한 바 있습니다. 백 년 전 독립선언에서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국민이 ‘자주민’이라고 밝힌 뜻은, 외세의 패권에 휘둘리지 않는 나라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신분이나 지위 또는 권력으로부터의 거리를 이유로 차별 받지 않는 공정한 나라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백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높이 들었던, 평화를 위한 공동선의 깃발입니다. 

 

5. 이 깃발은 인간의 최고선을 확립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회복하는 과제입니다. 공동선은 최고선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이요 맺어지는 열매와도 같습니다. 최고선과 공동선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는 역사의 대전환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대륙과 해양에 있는 주변 나라들의 관심과 이해관계가 집중되어온 금싸라기 땅이었습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겨레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국력이 미약했을 때에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 등 세계에서 가장 국력이 강한 네 나라의 세력각축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지난 백여 년 동안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어둠의 나날 동안에 우리의 깃발이 찢겨져야 했고, 짓밟혀야 했습니다. 

 

6. 그런데 21세기 초엽에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국민이 촛불혁명을 일으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자를 탄핵시키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이렇게 뽑힌 대통령이 촛불시민들의 여망을 받들어 나라를 정의롭게 개혁하는 한편 남북이 화해하고 분단 구도를 해체하려는 역사의 시동을 걸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우리 주변의 4대 강국은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7.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중무역분쟁은 만성적으로 대중국 무역적자에 시달려온 미국이 머지않아 미국에 버금가는 국력을 신장시킬 중국을 주저앉혀서 세계적 차원에서의 패권을 방어하고자 하는 목표도 있지만, 머지않아 분단이 극복되고 냉전구도가 해소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지역적 차원에서의 패권 경쟁 성격도 있어 보입니다. 최근에 불거진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대치상태도 표면적으로는 지난 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조치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되어 있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해방 이후로는 칠십 년 동안, 식민지배시절로부터 따지자면 백여 년 동안 일본의 하위 체제로만 여겨왔던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로 부상하면서 그 역할을 회복하려는 듯하자 사전에 예방차원에서 지역패권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8. 일본 총리 아베가 든 이 깃발은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배로 우리 민족을 고통스럽게 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역사를 역주행하는 잘못된 깃발입니다. 자유무역의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경제분쟁, 아니 역사전쟁을 일으킨 아베는 우리 사법부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도발의 배경임을 시사했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기초인 삼권분립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일본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한국의 공동선 구조를 인정하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고, 전쟁을 또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침략국가로 돌아가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베가 총리로 있는 일본 내각, 이 내각을 움직이는 극우 세력과 이에 휘둘리고 있는 일본 언론 등이 주도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공동선이 거짓된 평화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본 가톨릭교회 정의평화협의회 회장인 가쓰야 다이지 주교도 지적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식민지 지배 역사에 대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자세와 이에 분노하는 피해국, 한국인들의 마음과의 사시에 벌어진 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명확한 식민지배의 청산”을 포함하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일본이 과거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범죄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가 수립될 수 있습니다. 

 

9. 광복절 74주년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깃발을 들었습니다. 일본 국민들까지 군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나 침략전쟁에서 해방된 이날의 뜻을 기억해야 하고, 안보 및 경제협력을 지속해 온 한일우호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일본인들 전체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첫째 책임 있는 경제강국으로 자유무역의 질서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평등한 협력을 이끌어내고, 둘째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며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교량 국가가 되며, 셋째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광복을 완성하고자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이러한 희망과 열정을 갖지 못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일부 인사들에 대해서는 ‘이념에 사로잡힌 외톨이’로 남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10. 요컨대 새로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장점을 자각하고, 남과 북은 물론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인류가 보편적으로 발전시켜온 최고선과 공동선을 공유하며 서로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존중하고 스스로도 지켜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평화의 길에 앞장서야 할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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