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허무와 충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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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허무와 충만 사이

 

코헬 1,2; 2,21-23; 콜로 3,1-5.9-11; 루카 12,13-21

연중 제18주일; 2019.8.4.; 이기우 신부

 

1. 오늘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지혜를 전해줍니다. 이 지혜는 인생의 연륜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코헬렛의 저자가 겪어낸 개인적 체험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갖가지 다양한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민족들과의 대결 속에서 정화되고 깎이며 다듬어져 온 유다교적 지혜의 정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온갖 다양한 체험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겪어본 모든 것들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해서 그 자체만으로는 헛될 수밖에 없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래서 코헬렛에 담긴 이 깨달음도, 구약성경이 그렇듯이, 진리를 일부를 반영하는 진리의 조각이기는 합니다. 일부이기는 하되 중요한 조각입니다. 그 결론이, 유형무형의 모든 피조물과 현세적 가치가 허무하다는 점에서 불가(佛家)의 깨우침과도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2. 따라서 이 지혜를 받아들인 신약성경의 사람들은 한 가지 전제를 붙여서 알아듣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모든 것이 헛되며, 그리스도 없이는 세상만사가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예를 들면 보이는 물질로는 보화 같은 것이라든가 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명예나 인기나 사회적 지위 혹은 지식 같은 것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별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해가 될 수도 있는 허무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인생체험이나 대인관계의 인연조차도 그것이 그리스도로 이끌리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반추되거나 승화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자칫하면 독이 될 수도 있는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변치 않고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코헬렛이 일러주는 조각들을 맞추어서 온전한 진리로 충만하게 할 수 있는 복음의 지혜입니다. 

 

3. 진리의 조각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해질 수 있는 경로와 이미 충만해진 진리의 영성을 반영하는 것은 제2독서인 콜로새 편지 3장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세상살이 경험이 허무로 남을 것인지 혹은 충만에로 향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 안의 자유와 생에의 의지입니다. 그 자유와 의지가 사도 바오로가 현세적인 죄악들로 규정하는 것들로 기울어지면 인생의 허무로 남을 것이요, 그 반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부활의 기쁨으로 승화되면 새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충만함으로 남을 것입니다. 새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4. 이러한 참지식이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다니는 군중의 처지에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위장한 욕심을 벗어날 도리가 없어서, 유산 분배의 문제조차도 예수님께 개입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 싶은가 하면,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으로 신앙이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거둔 ‘소출’이란 그것이 곡식이든 재물이든 지식이나 권력이든 또는 명예나 인기든지 간에 죽을 때 절대로 가지고 갈 수 없는 헛된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생전에 사람들과 나누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에나 유용한 것이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자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5.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있으며,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한 일입니다. 오랜 깨달음의 전통과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가톨릭 교회가 지난 백 년 동안 반포한 사회교리는 개인들은 물론 인류 문명이 허무에 빠지지 아니하고 진리의 충만함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집대성한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계시에 바탕하되 성령께서 이끌어주신 건전한 이성 능력으로 세상 현실을 조명한 지혜의 보고입니다. 

 

6.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닮을 수 있고 또 닮아야 할 피조물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두고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성서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존재가 예수님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을 강생의 신비라고 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으면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요청이 나오는 것입니다. 프랑스대혁명과 동학농민혁명으로 표출되었던 바,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정신이나 사인여천과 시천주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가 인격성의 원리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민주주의 세상을 완성하는 원리는 바로 강생의 신비임을 또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성에 둔감한 종교는 강생의 신비 이전의 주술적 종교에 다름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존엄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7. 인간의 존엄성 원리는 공동선 원리로 나타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존엄한 존재로서 대우를 받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선이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존엄한 존재로서의 품위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사회적 조건을 뜻합니다. 정치권력은 이 공동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만일 정치권력이 공동선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하면 국민의 저항을 받아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민의 공동선을 무시한 정치권력이 흥한 적이 없습니다. 이 공동선 원리는 비단 정치권력의 존재이유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들은 물론 모든 중간집단들 역시 나름의 몫으로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공동선의 혜택에서 제외된 소수가 있다면 그 소수의 문제는 그들이 비록 그 수효가 적다고 하더라도 그들 소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선을 지키는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 그것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선에 무관심한 문명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언젠가 무너질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십자가로 증거된 인간 사랑이 하느님 사랑으로 승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8. 그런 이유와 의미에서 공동선 원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정의입니다. 한 사회, 한 시대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이 인간 존엄성에 있어서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사회와 그 시대의 공동선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한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면서 그 사회를 떠받치고 있지만 가진 힘이 없어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고 특히 가난한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불의한 바벨탑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때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그 척도를 삼으시겠다고 못박아 선언하셨습니다. 

 

9.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기본 원리로 하는 가톨릭 사회교리에 있어서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보조성이요 또 다른 하나가 연대성입니다. 보조성 원리란 그 책임에 있어서는 비록 보조적일지라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선에 기여해야 하는 바 정치권력과 교회와 가정과 기업과 학교를 비롯한 모든 사회조직과 단체들은 개인들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도와주는 것은 각 개인들이 사회의 공동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능력을 함양시켜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사회적 약자들일수록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일이 필수적인데, 이를 연대성이라고 합니다. 강자와 부자들과 달리, 약자와 가난한 이들일수록 서로 힘을 합해야 인간 존엄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체주의나 개인주의는 공동선과 공동체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 보조성과 연대성 원리에 반하는 사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찾아오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실 때 항상 그들의 자존심과 체면을 배려하여 대하심으로써 보조성 실천의 본을 보여주셨으며, 그들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셨을 뿐만 아니라 서로 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연대성의 본을 제시하셨습니다. 요컨대, 가톨릭 사회교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파스카의 길을 가게 하는 길잡이이며 또한 개인들과 사회가 세상의 허무에서 벗어나 진리의 충만함에로 나아가게 하는 지혜입니다. 

 

10. 최근 한국의 주도로 남북은 물론 북한과 미국이 화해하려는 국면에서 소외될까봐 이를 질투하는 일본이 도발을 해 오고 있지만, 역사인식이 잘못되었고 방식도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 사태는 한국인들을 더욱 분발시키는 계기로 작동할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분쟁 또한 향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경쟁의 포석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격변기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지혜로서 앞으로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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