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파스카의 길을 이끄시는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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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파스카의 길을 이끄시는 성령

 

창세 18,20-32; 콜로 2,12-14; 루카 11,1-13

연중 제17주일; 2019.7.28.; 이기우 신부

 

1. 연중 제17주일인 오늘 말씀의 초점은 성령이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인 루카 11장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그 결론으로 성령을 청하라고 일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콜로새 편지 2장에서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성령을 받은 세례 때에 일어난 영적 사건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사람의 영혼이 하느님과 상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지 못하는데,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에서는 이 연중 시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파스카 신비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는 흐름에 따르면서 오늘 말씀의 초점에 맞추어 우리가 걸어가야 할 파스카의 길을 이끌어주시는 성령께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 성령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고 예수님께는 어떤 역할을 하셨습니까?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시작이시고 마침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줄곧 강조하신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께로부터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세례 받는 일로부터 시작하셨는데, 그 까닭은 당신이 회개할 죄가 있는 죄인이어서가 아니라 장차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이 당신처럼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뜻에서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물의 세례는 성령을 받기 위한 필수적 준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도 정작 당신이 받아야 할 세례가 남아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남은 세례를 세례의 출발점인 물의 세례와 비교해서는 불의 세례요, 신앙의 목표인 부활과 대비해서는 십자가의 세례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이 불과 십자가의 세례로써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자리에서도 성령을 받을 준비로서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일러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성령을 받아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우리 영혼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도 사람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기는 합니다만 이 때 영혼의 상태는 마치 우리가 어머니 뱃속의 자궁에서 지냈던 태아의 처지처럼 태어날 때를 기다리며 스스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생기를 얻어서 비로소 하느님을 우리를 지어내신 분, 창조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야 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야 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어진 은총의 선물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 태어나 살아가라고 받은 이름이 각자의 세례명입니다. 이미 하느님 안에서 살고 가셨던 분들의 삶을 본받으라는 뜻에서 지어진 우리의 세례명은 다시 태어나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본명입니다. 새 인간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옛 인간으로 살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과도 그렇고, 이웃과도 그러하며 특히 영적인 존재들과도 역시 그러합니다. 

 

4. 새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우리는 여전히 몸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몸은 먹어야 살고, 또 입어야 하고 일해야 하며 쉬어야 합니다. 의식주와 일자리 외에도 수많은 물질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의 여부에 우리네 삶의 질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물질들을 도구로 사용하고 더 편리한 생활에 유용하도록 개발하며 이를 위해 노동을 해 온 역사입니다. 또한 인체도 성분상으로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상에서 만난 물질들로 인해 더 편리하고 더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직립하면서부터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만들었고 그 도구로 기계를 만들었으며 그 기계로 더욱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불을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섭취하는 영양분이 좋아지면서 두뇌 용적도 커져서 사고작용도 진화했습니다. 물질과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이 역사는 물질문명의 역사입니다. 

 

5. 인간이 물질문명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바탕이 하느님께 있음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는 주체는 우리이며 우리가 일해서 얻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양식도 일할 수 있는 몸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원기도의 형식으로 일용할 양식을 말합니다. 물질문명의 기본요소인 물질과 몸의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망각할 때 온갖 죄악이 저질러집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자각할 때 생존에 필수적인 물질들을 모든 사람이 고르게 얻을 수 있도록 경제질서를 개혁해야 함을 깨닫게 되며 몸이 건강할 수 있도록 양질의 섭생과 의료 혜택 역시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주어져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권력이나 재물 등 힘을 가진 자들에게만 유리한 그런 사회는 인간적인 문명사회라 부를 수 없으며 아직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비롯한 모든 물질에는 노동자들의 땀과 수고가 배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영이 깃들여 있습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라는 피조물에도 그렇습니다. 유형무형한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영이 깃들여 있음을 의식하고 이에 따라 사용해야 비로소 인간적인 문명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물질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와 노동과 과학 기술에 있어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어떤 이념으로 사회를 운영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영을 배제하는 데에서 비롯된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속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6. 주의 기도 후반부에 나오는 두 번째 청원기도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요청으로 되어 있지만 이 요청 안에는 가족이나 동료나 이웃을 비롯해서 우리가 대하는 모든 인간관계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룩하라는 더 근본적인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불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지혜를 빌어 표현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인연 속에 깃들여 있는 하느님의 계획을 의식하라는 요청입니다. 인간관계에서가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하느님 영의 현존을 감지하고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즘 인공지능을 매개로 한 4차 기술혁명시대가 다가온다고 말을 하지만 아무리 인류가 물질문명을 고도로 발달시킨다 해도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로 대할 수 있는 관계 질서를 촉진시키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선에 기여하는 정치질서가 소망스러운 것입니다. 그 목표에 있어서나 절차에 있어서 민주주의 질서의 근본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여하는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개인들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네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며,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관계의 행복과 영성을 재구성하게 해 줍니다. 있는 그대로 서로 받아들여주는 인간관계야말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개인적 차원의 하느님 나라 현실인 것이요 영원한 생명의 출발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한 파스카 과업이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라면, 그 혁명은 나를 둘러싼 대인관계에서 시작합니다. 

 

7. 세 번째와 네 번째 청원기도는 음식을 비롯한 물질이나 시간 같은 무형의 피조물 그리고 자연과 동식물과의 관계, 또한 우리를 둘러싼 대인관계를 넘어서서 우리가 과연 어떤 영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야 하느냐의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질을 남용하거나 시간을 낭비하거나 또는 동식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수탈한 업보는 물론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인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을 감지하지 못한 업보는 우리의 영성을 어지럽게 흐트려 놓습니다. 맑고 고요한 영성을 선물로 받으려면 우리의 모든 관계가 하느님의 영으로 이끌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를 조종하려는 영이 악한 영이라면 예수님처럼 치열하고 단호하게 맞서야 하고, 선한 영이시라면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 이끄심의 결과가 십자가 수난이라 하더라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부활은 그렇게 선한 영에 이끌려 하루하루 살아간 인생의 종착점에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죽기 전에라도 매일매일의 삶에서 맑고 고요한 영혼의 상태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8. 사도 바오로는 이렇듯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새로운 탄생의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세속적인 세상살이는 세례 때에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묻혀버렸고, 성령을 따라 사는 신앙생활 안에서 복된 영성은 부활신앙으로 예수님과 함께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빛이 비추어져야 할 현실에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악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없어서 멸망해야 했던 그 암담한 과거와 달리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파스카의 길을 걸어가는 의인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주역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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