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제자의 길, 사도의 길

49

본문

제자의 길, 사도의 길

 

이사 66,10-14ㄷ; 갈라 6,14-18; 루카 10,1-12.17-20

연중 제14주일; 2019.7.7.; 이기우 신부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를 따르는 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제자를 모으셨는데, 오늘은 이미 부르신 제자 열두 명에다가 예순 명을 더하여 모두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란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유와 목적은 제자들을 사도들로 양성하시는 한편, 메시아적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에서는 메시아적 백성을 모으러 파견된 제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자의 길을 넘어서는 사도의 길이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2.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데 있어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메시아적 백성을 모으기 위해 파견된 제자에게는 이 믿음과 안목에다가 예수님을 본받는 한층 더 철저한 윤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고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평소에는 당신의 생활양식에 대해서 별로 밝히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는 이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한층 자세한 항목으로 이른바 파견수칙을 말씀하시고 이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제자의 길에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될 수 있게 하는 리더십을 뜻합니다. 제자의 윤리보다 사도의 윤리가 더 엄격하고 철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우선 파견의 상황부터 둘러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을 보면 기왕에 모인 열두 제자뿐만 아니라 당신의 복음선포를 지켜보고 기적까지 목격했던 군중 가운데에서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온 이들을 예순 명이나 제자로 더 삼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이스라엘 방방곡곡으로 파견하실 때 일차 파견지는 그분의 복음선포를 들으러 전국에서 모여들었다가 흩어져 자기 가정으로 돌아간 토박이 지지자들의 가정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는 수칙을 요구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토박이 지지자들이 어떤 고을에 살든지 파견된 제자들을 받아들여줄 것을 전제했기에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는 수칙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4. 이러한 철저한 가난은 이미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지켜 오신 생활수칙이었습니다. 그분은 소득이 생기는 그 어떤 노동도 따로 하지 않으셨고 어디서 별도의 생활비나 활동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맨 몸으로 시작하셨고 복음을 선포받은 이들이 베푸는 선의와 자비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진복의 말씀도 나왔을 것입니다. 

 

5. 철저한 자발적 가난을 전제로 한 이러한 생활은 당연히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파견된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정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을 당하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수칙도 일러주셨습니다. 즉, 한길에 나가 큰 소리로,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는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소돔보다 더한 심판의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자비와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만 만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대자도 적지 않았고, 감시자도 들끓었으며 심지어 친척 형제들도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열정이 그분을 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로 이끌었습니다. 사도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도 이 긴장스런 상황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그 다음에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지향과 심정을 헤아려보겠습니다. 그분이 열두 명보다 훨씬 더 많은 일흔두 제자를 불러 모아 파견하기에 이르신 것은 그만큼 당신을 둘러싼 상황이 엄중하고 위급했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언자로 알려진 요한을 참수해 버린 포악한 영주 헤로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 이후로 사두가이파들이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있었으며, 바리사이들이 보낸 끄나풀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관련 혐의를 수집하고자 찰거미처럼 따라다니고 있어서 언제 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한 고을이라도 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예수님께서는 대규모로 제자단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러고도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보시는 것이 그분의 판단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파견할 수도 없었으니, 파견할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부르시고 임명하시면서도 사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명심하고 계셨음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7. 복음서에는 파견받은 제자들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한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제법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습니다. 토박이 지지자들의 협조를 받아 그 집에 머무르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해야 했던 일도 얼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파견으로 예수님께서 계획하시고 의도하셨던 바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시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공생활 중에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진실입니다. 

 

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견 활동의 성과로 말미암아 의기양양하게 기뻐하던 제자들에게 조언을 주셨습니다. 즉, “영들이 너희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임ㅂ니다. 이 말씀은 일해서 얻은 성과보다도 하느님의 일꾼이 된 것을 더 기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고, 성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일의 성과는 일회적이고 그때그때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잘 될 수도 못 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나면 그 일은 얼마든지 되풀이해서 일생동안 지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일단 하느님의 도구가 된 사도로서 행한 선교활동의 성과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하느님께서 채우시고 쓰실 것이기 때문에 성과의 좋고 나쁨은 하느님께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9. 이 점에 있어서는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보여주는 태도가 모범입니다. 그는 적어도 갈라티아 지방의 공동체에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수한 고생을 했고 억울한 희생도 바쳐야 했지만 공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말은 풀어서 보자면, 그가 겪은 고생은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그 고생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달은 후에 견딜 수 있는 기운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모범입니까? 

 

10. 이렇게 예수님께서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세상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하느님의 백성이자 메시아적 백성이 될 사람들을 모으는 사명은 모든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기보다는 지도자급 평신도들, 수도자들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특히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서 교회 전체가 우리 민족 사회 전체에 대하여 증거해야 할 파견의 윤리요 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 66장에서는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에게 기뻐하라는 예언의 메시지가 나오는데,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기쁨을 상실하고 슬픔과 고통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로 파견되어야 한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사야가 이러한 메시지를 동족들에게 선포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70여 년에 걸친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을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이 생겨났던 것인데, 이사야는 이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약속했습니다. 

 

12.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 메시지는 현재 우리 민족의 상황에서 두 가지 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갈 길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의 민족으로서 갈라진 겨레의 고통을 이제는 종식시켜야 한다는 사명이고, 둘째는 우리 한국 사회 안에서 땀 흘려 일하면서도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위로해야 한다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는 갈라진 겨레의 일치를 위한 지향이 맨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일하면서도 일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을 위한 지향이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 지향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행동이 평화와 관련된 선택은 물론 노동자들과 관련된 선택에 있어서 기도한 대로 이끌리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이 조건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수받고 알리는 존재로서 민족 안에 자리매김할 것인지, 혹은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존재로서 민족 안에 자리매김할 것인지 판가름내는 조건입니다. 전자는 우리 교회를 제자 교회로서 여러 종교집단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만들 것이요, 후자는 사도 교회로서 민족을 위한 사제로 자리매김하게 만들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