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메시아를 따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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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메시아를 따르는 길

 

1열왕 19,16ㄴ.19-21; 갈라 5,1.13-18; 루카 9,51-62

연중 제13주일; 2019.6.30.; 이기우 신부

1. 예수성심성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예수성심을 본받아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2. 제1독서에서 들으신 말씀은 예언자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그 대를 이어가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엘리사를 지목하여 후계자로 세우셨다고 알려주셨으므로, 엘리야는 그저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주는 행동만으로 그를 제자로 부를 수 있었고 기름을 부어줌으로써 예언자의 권위를 부여해 주었으며, 엘리사는 이에 순명했습니다. 하느님과 예언자 사이, 예언자의 선임자와 후임자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3.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제9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제9장은 전체 흐름이 메시아를 어떻게 따를 수 있는지를 전해주고 있는 대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고, 빵의 기적도 행하셨으며,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후에 사도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를 포함한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신 이유도 십자가를 짊어질만한 굳센 신앙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은 파견받을 때에 더러운 영을 쫓아낼 권한을 부여받았으면서도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할 정도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겸손하게 서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도들 상호간의 겸손이 있어야 성령을 받아들일만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래야 더러운 영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4.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메시아를 따르는 데 있어서 발견되는 유형이라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먼저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적대적이었으므로 유다인인 예수님도 그러리라는 선입견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배척해 버린 것입니다. 

 

5. 그런가 하면 복음선포에 따르는 십자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명성만 바라보고 따르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분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분과 제자 일행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해 오셨습니다. 복음선포 생활에 따르는 이러한 자발적 가난의 십자가를 감안하지도 않고 설익은 결심으로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이 거절한 것입니다. 

 

6. 그런데 다행히 예수님의 눈에 든 두 사람은 부르심을 듣고 나서 일상사를 핑계로 사양을 합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를, 또 한 사람은 작별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고 했지만, 하느님 나라 선포의 시급성을 모른 체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못 미더워하셨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과 제자 인연을 맺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7. 정작 메시아를 따른 사람은 예수님의 생전에는 만나지도 못했고 돌아가신 다음에도 그분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했던 바오로였습니다. 율법에 대해 눈먼 열성으로 설치던 그를 돌려세우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고, 그 방식은 박해하러 쫓아가던 그를 벼락을 쳐서 눈을 멀게 한 후 신자 하나니아스를 보내어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세례를 받은 바오로는 그 후 십 여년 이상 동안이나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과 예언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검토하는 숙고의 세월을 보낸 끝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결론을 내리고 선교사의 길로 나섰습니다. 

 

8. 그가 갈라티아 편지를 쓴 때는 이미 두 번째 선교여행 길에서였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쓴 여러 편지들 중에서 이 갈라티아서가 특별한 이유는 메시아를 따르는 길에서 사도 바오로가 깨달은 바를 섣부른 이완주의로 공격하는 기성 사도단 수하들의 복고적 율법주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은 열두 사도단에도 들지 못했던 바오로를 비주류로 제쳐놓고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생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배우지 못한 이류 사도요 따라서 얼치기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유다인들이 서약하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함부로 면제해 버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주장은 이미 사도 바오로로부터 할례를 면제받고 세례를 받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에페소 선교를 하다가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는 수인의 처지이면서도 격한 어조로 편지를 써서 갈라티아 지방의 공동체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런 정황 때문에 갈라티아 편지에는 그 어떤 편지에서보다도 사도 바오로의 속내가 물씬 묻어납니다. 

 

9. 오늘 들으신 제2독서의 내용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갈라티아서 제5장은 사도 바오로의 자유론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조상들이 전해준 율법에 열성적이었던 바오로였고, 그 율법에 대한 열성 때문에 눈이 가리어져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기까지 했던 전력이 있는 바오로였기 때문에, 그는 바리사이들도 아니고 다름 아닌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이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티아 지방의 공동체 신자들을 방문해서 율법적 신앙을 선전하는 바람에 격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0. 이 말은 선과 악을 알게 해 주는 율법만으로는 메시아적 백성이 될 수 없고, 악에 맞서서 선을 야무지게 실천하는 사랑으로만 메시아를 따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에 이르지 못하면 결국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갇혀서 또 다른 종살이의 멍에를 메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자유란 사랑을 실천하려는 책임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은총입니다. 따라서 권리도 책임을 위해 주어진 것일 따름인데,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매몰된 사람들은 권리의식의 종살이를 멍에처럼 메고 다니게 됩니다. 

 

11. 오늘날에도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이 배척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흠결을 핑계로 예수님의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자로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책임은 소홀히 한 채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나이롱 신자들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사에 치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해야 할 바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냉담자들도 흔합니다. 

 

12. 하지만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이어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거듭 확인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파스카 여정에 있어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찾아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고 그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어야 한다는 책임은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책임이자 메시아적 백성으로서의 의무입니다. 이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자유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3. 베드로 이래 제266대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메시아를 따르는 길에 대해서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주고(1항) 제자들의 공동체를 활기차게 합니다(21항).” 이를 위해 “저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무엇보다도 시대의 징표를 꼼꼼하게 참구하기를’ 권고합니다(51항).” “목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 관심을 보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182항).” “하느님께서는 사회적 약자의 해방과 증진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온전하게 사회[라는 몸]의 한 지체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체를 부르셔서 당신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이는 도구인 우리가 사회적 약자가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과 그들을 보조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187항).” “다른 이가 겪는 고통에 우리가 깊이 공감하여 움직일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193항).” <이상 「복음의 기쁨」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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