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새 하늘과 새 땅: 西學과 茶山과 東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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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새 하늘과 새 땅: 西學과 茶山과 東學

 

사도 14,21ㄴ-27; 묵시 21,1-5ㄴ; 요한 13,31-33ㄱ.34-35

부활 제5주일; 2019.5.19.;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사랑의 계명을 전하기 위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 지방 곳곳에 공동체를 세웠고 이 공동체들을 사목할 책임을 물려 받은 요한은 이 공동체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렀습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이 땅에서는 과연 어떻게 실현되어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우리는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울만큼 아름다운 5월을 교회에서는 성모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역사에서 5월은 유난히 국가 폭력이 자행되고 이에 민중이 저항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때이기도 합니다. 근래 들어서는 박정희가 일으킨 1961년의 5·16 군사정변, 전두환이 일으킨 1980년의 5·18 광주 학살 및 민중 항쟁을 대표적으로 기억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의 근세 초기인 1894년 5월에 왕조의 무능과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농민들이 봉기한 동학 농민 혁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금년부터 매년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의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여 조선왕조의 부패한 관료들과 일본군에 맞서 남도 농민들이 벌인 항쟁을 공식적으로 기리기로 했습니다. 과거에는 ‘동학난’이라고 격하시켜 부르던 이름을 이 정부가 그 역사적 성격에 맞게 바로 잡은 데에는 동학혁명의 정신이 백 여년이 흐른 뒤에 촛불혁명으로 부활해서 정치권력을 민중의 뜻대로 세운 정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왕의 목을 친 역사’가 이 땅의 반만년 역사에서는 처음입니다. 

 

3. 정부에서 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해 선택한 날이 5월 11일입니다. 1894년 이 날은 동학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과 처음 싸워 크게 이긴 날입니다. 전봉중·손화중·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관군과 격돌해 처음 대승한 날이며, 이날을 계기로 전주성을 함락시킨 농민군의 혁명 열기가 크게 고양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전개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4. 당시 임금 고종은, 전주에 모여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쳐들어오려던 동학교도들을 물리쳐 달라고 어이없게도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이 바람에 조선에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왜군까지 들어오게 되었고, 무기라고 해 봤댔자 겨우 죽창을 들었을 뿐인 동학혁명군은 신식 장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이 왜군에 의해서 몰살당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 들어온 청군과 왜군은 청일전쟁을 벌였고 왜군이 청군을 물리쳤습니다. 그 이후 국운이 기울어져만 갔던 조선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후 불과 십 년만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서 조선 왕조를 부흥하자는 소리는 간 데 없고 백성의 나라를 세우자는 뜻으로 민심이 모아져 그 한 달 후에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만 보아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는 전혀 없이 어리석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도 무지했던 고종의 대한제국이 왜 민심을 잃어버렸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의 나라 시대는 가고, 백성의 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5. 그 이전에도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백성이 민란을 일으킨 적은 여러 있었지만, 나라를 새로 세우자는 움직임은 처음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동학농민혁명으로 농민들이 각성되고 힘을 모으기까지 ‘동학’의 사상으로 민중을 이끌었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가 있었고, 그 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로서 하느님과 인간에 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는 사람을 대하기를 하느님처럼 대하라는 뜻으로서,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에서 공식적으로 홍보하기로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하늘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전북에서 멀지 않은 전남 강진 땅에서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5백 여권에 이르는 책을 펴낸 동시대의 인물인 다산(茶山) 정약용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니까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다산으로부터 전해 받은 강생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을 토착화한 깨달음인 셈입니다. 

 

6. 다산은 누구입니까? 다산 정약용은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우리 민족 역사상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학자이지만, 그가 최고의 학문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주학을 연구하던 천진암 강학회의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의 인품과 학식을 아끼던 정조 임금이 그를 모함하고 죽여 버리려던 간신배들로부터 보호하느라고 보낸 유배생활의 덕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왕권과 신권이 절묘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된 조선 왕조가 이 정조 때부터는 왕이 아끼는 신하도 건사하기 힘들 정도로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이 드세어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합니다. 다산이 인품과 학식을 알아보았던 정조는 이승훈 같은 다른 천주교 배교자들처럼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냄으로써 다산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7. 유배 생활을 하며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홀로 살아야 했던 다산이 동양의 전통적 학문 전토을 망라할 만큼 그리도 깊이 있고 서양의 새로운 학문 조류마저도 통달한 국제적 정세를 꿰뚫어보는 학문을 연구할 수 있게 만들어 준 학문적 영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원천이 바로 천진암에서 있었던 천주학 강학회였습니다. 천진암 강학회는 기울어가는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실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이 실학 서적과 함께 중국에서 들여온 천주학 서적들을 연구하며 장차 천주학과 천주교를 통해서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연구 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이벽은 북경으로 이승훈을 파견하여 천주교 세례를 받아 오게 했고, 이승훈에 의해 세례받은 천진암 선비들이 명례방과 양평에서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시작했을 만큼 천주교의 모태요 발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강학회에서 정약전, 정약종 등 형들과 함께 스물 살의 어린 나이로 참가했던 정약용은 이벽으로부터 풍요로운 신앙적 지혜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벽은 일찌감치 천주학 서적을 들여왔던 가문의 덕분으로 출중한 지식과 지혜를 겸비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을 정도로 이벽은 그 이름에 걸맞게 한국 천주교의 길을 닦은 선구자였고 다산의 스승이었습니다. 

 

8. 당시 조선 왕조와 노론에 속한 주류 선비들이 성리학의 이데올로기로 이 새로운 움직임을 탄압했고, 또 교황청에서도 조상제사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천주교는 박해를 무려 백 년이나 받아야 했고, 정약용도 배교를 강요당해서 장기간 유배를 당했던 탓으로 그 당시에는 천주교를 통한 조선 사회의 개혁은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의 처가인 해남 윤씨의 집성촌이 모여 있던 해남은 강진에서 산 몇 개만 넘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정약용은 비록 유배를 당하는 고달픈 몸이기는 했으나 처갓집에 소장하고 있던 장서들을 아쉽지 않게 읽으면서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 그가 저술한 책들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신앙의 영감을 받고, 짧은 벼슬 생활에서나 유배 고장에서 목격한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구해 내야겠다는 사명감, 그리고 이대로 갔다는 나라가 망해버릴 것 같이 극에 달한 탐관오리들의 부패를 척결해야한다는 개혁의지에서 나온 산물이었습니다. 다산 못지 않게 총명했던 출중한 인재는 더 있었지만, 다산의 학문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었습니다.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인정하지 않는 다산 연구자들도 이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9. 다산을 만난 수운이 비록 천주교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산의 학문적 훈도를 받고 사상적 세례를 받았기에 그는 유불선(儒佛仙)과 그리스도교를 모두 합했다는 동학을 창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월(海月) 최시형을 거쳐 전봉준 등이 농민혁명을 일으킬 때 경전처럼 읽고 혁명의 대의로 삼는 근거가 되었던 책이 바로 다산이 저술했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 같은 책이었습니다. 수운은 다산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 강의를 듣고 나서, 교리는 옳으나 서양 선교사들을 앞세워 하는 행태는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담은 동학을 창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뜻을 같이 하던 농민들이 신분을 타파하고 농지를 개혁하며 민중의 힘으로 집강소를 세워 주민자치를 시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산의 혁명사상은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로 시작해서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당시 수운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에서 신문하고 서소문 장터에서 효수한 관아에서 그를 서학죄인으로 처벌한 것이나,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려던 관군들이 다산이 지은 경세유표를 없애버리려고 포졸들을 동원한 것만 보더라도 이러한 정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학은 토착화된 서학이었던 셈입니다. 

 

10. 공식적인 역사의 기록에서 다산은 동양의 정신문화에 무지하던 교황청이 내린 조상제사금지령에 승복할 수 없었던 자발적 배교자요 정적들의 미움을 받아 유배당한 죄인일 뿐이지만, 이는 뒤틀린 가치관 속에서 무능했던 왕권과 이를 뒤에서 조종한 노론 세력의 횡포에 희생당해야 했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 즉 민중사관에서는 그는 엄연히 천진암 강학회에서 싹튼 뜻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으로 꽃피웠던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초기 천주교가 배출한 걸출한 인재였으며, 그의 혁명적 사상을 정신적 무기로 삼아 나라를 구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동학교도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뜻이, 서학으로부터 다산을 통해서 동학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11. 이렇게 이 나라 근세 역사 안에서 부패하고 무능했던 지배층의 억압에 대한 저항은 서학과 동학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서학은 박해를 받았지만 치명할지언정 박해에 굴하지 않고 전국 곳곳에 세운 교우촌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선구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으로 저항했으며, 뒤이어 나타난 동학은 다산의 학문을 디딤돌 삼아서 직접 관군과 대결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12. 이러한 근세 초기의 우리 역사가 갖는 성서적 의의는 이렇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라는 구조악의 억압 속에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의 부패와 무능을 겪으며,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을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서는 서학의 교우촌과 동학의 집강소에서 실천한 진리로 나타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은 인류 문명의 길잡이이며 부활한 인간이 살아갈 가치관입니다. 이를 전하고 실천하고자 바오로 일행은 이스라엘을 벗어나 역시 로마 제국이 통치하고 있던 소아시아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공동체들을 건설했습니다. 바오로의 뒤를 이은 요한도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 파트모스 섬에 갇혀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복음진리의 희망을 전하고자 묵시록을 남겼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화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실현된 세상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13. 이러한 우리의 역사가 지니고 있는 성서적 의의를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기 위해서도 이 성모성월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모 찬송에 담긴 파스카의 메시지입니다.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으며,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하는 메시지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해야 할 인류의 역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백 년의 역사는 3·1독립만세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때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세우고자 하던 민중의 외침은 그 16년 전 민중의 나라를 세우고자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동학은 수운 최제우의 깨달음 없이 말할 수 없고, 최제우의 깨달음은 다산 정약용의 사상 없이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정약용의 학문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시작된 서학의 천주교 교리 없이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서 서로 사랑하는 문명을 세우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천주교의 교우촌과 동학의 집강소로 나타난 바, 종교적 진리를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역사적 교훈이 역사의 길잡이요 이정표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4. 이제는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서 박해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유배를 당하면서 연구하거나 저술할 필요도 없으며, 더욱이 피를 흘려서까지 혁명을 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벽과 천진암 강학회의 선비들이 탐구하던 진리, 정약용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면서 18년 유배 세월 동안 저술한 진리, 무엇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일구며 실천하던 진리와 동학교도들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실천하던 주민자치의 진리가 고스란히 가톨릭 사회교리에 담겨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서로 사랑하기 위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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