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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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 5,27ㄴ-32.40-41; 묵시 5,11-14; 요한 21,1-19

부활 제3주일; 2019.5.5.; 이기우 신부

 

1. 부활 시기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생전에 가르쳐주신 진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고, 이 진리를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한 자세를 확립시켜주시는 때입니다. 신앙도 자세도, 십자가 죽음 이전의 공생활에서 제자들은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 시기의 전례에 참여하는 우리도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제자의 입장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능동적인 사도의 입장으로 전환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녀야 하고 이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이 고백을 용감하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과 고백과 증거,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발현하실 수 있는 전제조건이며 또한 그분을 만나서 부활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필요조건이기도 합니다.

 

 

2. 마치 보충수업을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로 부르셨던 이들을 찾아가셔서 흔들리던 신앙을 굳세게 해주시는 한편, 특히 베드로에게는 의도적인 물음을 던지셔서 신앙 고백도 들으시고 신앙을 증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용기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티베리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생업으로 돌아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풍어의 기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당신을 하느님을 믿을 수 있도록 신앙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에게는 특별한 방식으로 보충수업을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다른 제자들처럼 멀찍이 도망을 치지는 않았지만 연루될까봐 두려워서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로 베드로를 불러 물어보셨습니다. 이 때에 부르는 호칭도 어부로 지내던 시절과 신앙 고백 이전의 호칭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러니까 이 호칭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3. 그리고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열성적이었고 덜 비겁했음을 기억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모든 사정을 다 아시고 물어보시는 데야 베드로가 달리 드릴 말씀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대답을 듣고서야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의 물음과 답변을 세 번이나 주고 받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이러한 말씀에 따라서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유대교 대사제가 이들을 불러들여 신문하며 복음선포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런 압박을 견디면서 복음선포를 하는 것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는 신앙증거의 십자가였는데, 이전과는 매우 다르게 그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하고 말하면서 용감하게 이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전의 겁 많고 유약했던 모습과는 영 딴판으로 달라진 사도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격분한 대사제는 이들을 죽이고 싶었지만 명망 높았던 최고 의회 의원인 가말리엘이 말리는 바람에 매질만 하고 방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런 박해를 받으면서도 이전과는 아주 달라진 반응을 보였습니다. 즉,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를 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모욕을 당하는 일이 기쁠 리는 없습니다만, 일종의 부채의식과도 같이 예수님께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분 때문에 매질을 당하는 모욕조차도 그분의 수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엠마오 발현 이후 미사 중의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발현하시는 양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여 행하는 전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에 맞추어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심으로써 성체성사 제정이 파스카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고, 최후의 만찬 직전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가르치셨는가 하면 그 직후에는 첫째가 되려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심으로써 성체성사를 계승하기 위한 성품성사의 조건이 섬김이라는 것도 역시 분명히 하셨습니다. 

 

6. 섬김을 실천하여 파스카를 구현하자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필수적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니라.”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빵과 당신 몸을 일치시키셨고,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너희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흘릴 내 피니라.”하고 말씀하심으로써 포도주를 당신 피와 일치시키시셨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몸과 피라는 말씀은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십자가를 잊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체성사를 열두 제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너희와 많은 이의 죄 사함을 위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맺으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이루는 사제들이 신자들을 섬길 수 있어야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사제들의 직무사제직이 모든 신자들의 보편사제직으로 개방되게 됩니다. 

 

8. 그리하여 섬김의 자세로 파스카를 향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권장되어온 덕목이 복음삼덕입니다. 순명과 정결과 청빈의 복음삼덕 안에 예수님을 재현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십자가가 들어 있습니다. 

 

9.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끄신 분은 성령이시고 부활시키신 분도 성령이시기에 가장 첫째가는 덕목은 성령께 대한 순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러한 구원계획을 아시고 파스카 축제의 전통 위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 대한 순명은 파스카 정신을 구현하려는 다짐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모세 시대에 일어난 파스카 사건은 이집트 파라오의 권세 하에서 노예살이로 고생하던 히브리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이집트 탈출 사건이었던 것처럼, 역사의 파스카도 세상의 악에서 사람들을 특히 현대판 노예처럼 고통받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과업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엑소도스 파라다임이라고도 부르는 파스카적 역사관인데, 그러자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섬김과 물질에 대한 청빈의 자세입니다. 

 

10.  정결서원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이라고도 말합니다. 힘으로 억누르거나 서로 이용하는 세속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 섬기는 복음적인 인간관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두 가지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살아가신 것처럼 성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독신생활의 탁월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결한 성의 결합으로 이루는 섬김입니다. 독신을 선택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같은 기혼자도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보듯이 결혼하여 이루는 가정을 축복하시고 성가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성은 봉헌의 대상일 뿐 아니라 결합의 조건으로서 정결하게 가꾸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독신이든 혼인이든 삶의 형태는 우리가 하느님께 약속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책임 아래 선택하는 것이지만, 독신이든 혼인이든 섬김을 위한 인간관계로써 하느님 나라에 기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부담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이기적인 독신이나 사랑이 필요한 이웃 가정을 외변하고 자기 가족들만이 행복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가정은 성에 관한 예수님의 태도와 배치되고 하느님 나라 계획에도 배치됩니다. 그래서 독신이든 혼인이든 정결한 성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사람들을 섬기려는 신앙 증거의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11. 청빈서원은 물질에 대한 태도의 결정체입니다. 성이 그 자체로 악한 것도 아니지만 떠받들어질 것도 아니며 다만 섬김을 위한 축복인 것처럼, 물질 역시 그 자체로 악한 것도 아니지만 떠받들어질 것도 아니며 오직 나눔을 위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청빈의 정신으로 검소하게 살아야 나눌 몫이 생깁니다. 그래야 나눔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12. 결국, 복음삼덕으로 살아가는 일은 성체성사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입니다. 역사적인 파스카를 향하여 서로 섬기고 서로 나누는 삶이야말로 발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삶의 양식이며 그분을 기억하고 계승하며 재현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명서원에는 파스카 역사의식이 담겨있어야 하고, 정결서원에는 섬김의 사회의식이 담겨있어야 하며, 청빈서원에는 나눔의 연대의식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이 삶에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그분을 따를 수 있는 자격으로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일치할 수 있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깨우침을 주는 부활 시기는 사순 시기의 보충수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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