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토마스, 불신앙의 표본인가? 합리적 신앙의 모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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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불신앙의 표본인가? 합리적 신앙의 모델인가? 

  • 토마스 사도론

 

사도 5,12-16; 묵시 1,9-11ㄴ.12-13.17-19; 요한 20,19-31

부활 제2주일; 2019.4.28.;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부활 제2주일입니다. 오늘이 또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반포된 것은 2001년부터인데,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신심이 특별했던 파우스티나 수녀가 보기 드물게도 현대에 이르러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체험을 여러 번 했고 이를 온 생애에 걸쳐 증언했으며 이 증언의 메시지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교회의 권위로 인정했고 시성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메시지란, 갈수록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잊어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 의탁해야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임을 명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푸른 망토를 입으신 예수님의 심장에서 빛이 쏟아나오는 성화와 그 아래에 “나는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하는 글귀가 전세계에 널리 퍼졌습니다. 

 

2. 그런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이면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복음에 등장하기 때문에 파우스티나 수녀와 달리 토마스 사도는 불신앙의 표본인 것처럼 알려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사도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 그가 고백했던 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기도를 성체성사에서 성체와 성혈을 거양할 때 바치도록 하는 새로운 성체신심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토마스는 불신앙의 표본인 것일까요? 

 

3. 토마스는 자신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동료들의 증언만 듣고서는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면서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자신의 눈으로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어찌보면 합리적인 태도입니다. 보고, 만지고, 확인한 다음에는 믿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토마스 앞에 손에는 못자국, 옆구리에는 창자국이 지니신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그는 차마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는 것만으로 확인하고는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4. 그러한 토마스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응수하셨습니다. 이래서 부활 신앙에 있어서는 보고서 믿는 사람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의 두 부류로 신앙인을 나누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발현체험을 하게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활동했던 제자들이거나 파우스티나 수녀 같이 특별히 간택된 인물뿐입니다. 따라서 보고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5. 오늘날 우리를 비롯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지 않고서 믿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지는 못하지만 증언을 듣고서 믿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지식은 그것을 전달해주는 교사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 교사의 인격과 학식을 믿고 그가 가르쳐준 지식의 진리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식마다 그를 처음 발견해 낸 사람의 설명을 듣거나 그 사람을 직접 봐야만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낳아 기르신 부모님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를 낳는 그 순간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르시는 부모님의 사랑과 눈빛을 통해 그분들이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임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더 합니다. 매사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말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면 사회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만 듣고도 굳이 확인하지 않고 관계는 유지되며 그 관계에 따른 일도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만일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증빙서류를 첨부해야 하며 그 서류를 하나하나 대조해서 위조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려 든다면 사회생활은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이 진실해야 하고 거짓말이 드러나면 그의 인격이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전례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기운도 사제와 신자들의 믿음과 대화로 그 어떠한 의심이나 확인 절차도 필요없이 전해집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사제의 인사말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는 선언의 준말입니다. 주님의 현존 증언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따지고 드는 신자도 없거니와 확인해 줄 방법도 딱히 없습니다. 그래서 이 증언을 믿거나 아예 들어도 믿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7. 독서와 복음, 강론과 신자들의 기도에 담겨있는 주님의 현존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와 복음의 봉독자는 자신의 목소리로 읽고나서도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하고 선언합니다. 봉독자의 목소리에 담긴 주님의 음색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봉독된 성서 내용은 물론이고 봉독한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보아 우리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습니다. 강론도 신자들의 기도에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전제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말씀드리는 그 영적 대화의 구조가 미사라는 전례에서 우리가 주님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입니다. 현대판 발현의 현장이라는 뜻입니다. 

 

8. 미사를 비롯한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지 않는다면, 그래서 토마스처럼 손이나 눈 같은 직접적 감각으로 확인해야만 한다면, 교회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집전자도 예수님이 아닌 이상 확인시켜줄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신앙에 바탕한 진실한 인격과, 죽기까지 다하고 심지어 박해가 닥치면 목숨까지 걸고 충실하려는 생애와 또 그 생애 중에 투신하는 활동의 기운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은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9. 이제 우리는 비로소 발현과 증언이 우리의 현존체험과 현존의식으로 전환되는 비결을 발설한 셈입니다. 그것은 성령, 바로 그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성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전달하십니다. 복음선포의 생애와 열정, 사랑을 위한 수난과 죽음의 결단,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생명의 기운으로 전달해 주시고 충만케 하시는 원리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10. 그래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예루살렘 당국의 박해 시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도 비밀리에 여기저기서 믿게 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초대 교회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과 갈릴래아 지방은 물론,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시리아 지방을 거쳐 소아시아 전역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 바로, 성령의 역할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르나바, 바오로 그리고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성령의 불쏘시개 노릇을 했습니다. 비록 요한은 로마 당국의 박해를 받아 파트모스 섬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 섬에서도 그는 성령을 받아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편지를 묵시록의 형태로 써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11. 성령께서는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으면서 동굴로 기도하러 오는 사도 요한에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환시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환시는 착시로 인한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기억력과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일곱 개의 황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야 두 말할 것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12. 사도 요한은 이 환시에 따라 일곱 교회에 모여 있는 신자들에게 묵시문학 형식으로 쓰여진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도 요한이 직접 챙겼으며, 나머지 여섯 교회의 으뜸이었지만 초심을 잃어버려 걱정하던 에페소 교회, 고난 가운데 궁핍한 스미르나 교회, 군사적 중심지로서 박해가 특히 심했기 때문에 말씀의 쌍날칼을 쥐어준 페르가몬 교회, 수완 좋은 유다인들이 많아서 신자도 많았지만 우상숭배에 빠진 티아디라 교회, 잦은 전쟁으로 승리의 흰 옷을 입은 사람도 있지만 죽은 사람도 많았던 사르디스 교회, 전쟁의 성문이 수시로 열리고 닫혔던 필라델피아 교회, 부유해서 신앙이 미지근해진 라오디케이아 교회 등에게 구체적인 사목 지침을 전달했습니다. 이 일곱 교회에게는 이 묵시록 편지가 사실상의 부활 증언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를 불신앙의 표본으로 보든, 합리적 신앙의 모델로 보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토마스 사도는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겠다고 하든, 그분의 부활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있겠다고 하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진정성과 충실성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또 듣고 싶어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먼저 믿는 사람들, 즉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변화와 부활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요. 교회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여야 하고, 세상 역시 신용 사회여야 바람직하며, 우리들의 인간관계 또한 신뢰로 가득찬 사이여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입니다. 

페루 비아엘살바도르 본당 크리스토발 사제와 함께 공동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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