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

76

본문

[사진설명] 강좌(講座) 가톨릭연구(硏究)

당신의 흥미를 끌 가톨릭운동 중 하나는 우리 평양선교지의 새 잡지를 출판입니다. 작년 교구장 연총에서 발간이 결정된 잡지는 대부분이 문맹자들인 우리 양떼들에게 너무 수준이 높습니다. 우리 지방 잡지는 쉬운 말로 세분야, 즉 성서와 교회사와 실천적 지침을 내용으로 하는 월간인데 12월에 첫 호가 나왔습니다. 2월호는 2,500부 찍을 예정입니다. 이 잡지는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지에서도 호평을 받아 주문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견본으로 몇 가지 주제를 보냅니다.

<목요안 신부 347쪽>

1934년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창간하여 한국가톨릭의 문화와 학술을 대변한 잡지.   천주교월간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톨릭조선(─朝鮮))]

1934년 평양교구에서 창간하였다. 창간당시의 제호는 『가톨릭 연구 강좌』로,1933년 9월 평양교구에서 실시한 강습회에 참가했던 전교회장들이 강습회를 계속하기 위해 전도협회라는 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강사진들이 이 후원회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매달 20일에 50∼90면의 A5판으로 발간하였다.
신부 홍용호(洪龍浩)를 편집인으로 정하고, 편집 실무는 김구정(金九鼎)이 담당하였다. 1933년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교회내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된 상태였기 때문에 편집인 홍용호는 창간사에서 『가톨릭 청년』을 포교전의 돌격대로, 『가톨릭 연구 강좌』를 돌격대의 무기인 창과 칼에 비유하여 『가톨릭 연구 강좌』의 창간을 정당화시켰다.
그 뒤, 1934년 3월평양관후리성당(館後里聖堂) 사제관에 있던 편집실을 서포(西浦)의 교구관리소로 이전하면서 7월호부터 『가톨릭연구』로 개칭, 동시에 후원회는 가톨릭연구사로 발전, 개편되었으며, 이어 8월에는 평양교구 가톨릭연맹중앙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1937년 제호가 다시 『가톨릭조선』으로 바뀌고, 발행소의 명칭도 가톨릭조선사로 바뀌었다. 초기에는 성서해설·호교·교회사·전례·주일학교교리 등이 주였으나, 차츰 문예란·아동란·독자란 등이 증설되었고, 조선순교기념·대구교구설정 26주년기념·간도선교(間島宣敎) 40주년기념 특집 등의 기획기사를 마련하는 등 편집내용과 체제가 다양해졌다.
1936년 『가톨릭청년』의 폐간 이후 한국천주교에 단 하나 남은 잡지로서, 193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기까지 민족 항일기에 한국가톨릭의 문화와 학술을 대변하였으며, 오늘날 평양 교구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설립자 목 요안 모리스의 가톨릭운동

2021년 12월, 윤 세라피나 수녀 작성

 

1)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이란 무엇인가?

1905년 교황 비오 10세의 제창에 따라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하에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 활동’을 뜻하는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은 성서운동(Bible Movenment)과 다르다. 성서운동은 평신도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과 함께 성서를 중심으로 이루어가는 다양하면서도 역동적인 제반 활동을 통칭한다. 그러나 가톨릭운동은 교구장의 위임을 전제로 성직자의 사도직 직무에 평신도가 참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평신도 활동을 의미한다. 가톨릭운동의 네 가지 조건은 위임, 조직적인 사도적 평신도 활동이다.

가톨릭운동이란 용어를 단체에 처음으로 적용시킨 사람은 교황 비오 10세(재위: 1903-1914)였으나 평신도의 교계적 사제직 참여란 명확한 개념에서 평신도운동을 조직화한 사람은 비오 11세(재위: 1922-1939)이다. 가톨릭운동의 대표적인 운동은 이탈리아를 모델로 해서 대부분 의 나라에서 남여 청년과 대학생 그룹으로 형성되었고 또 단일 운동으로 발생하였다. 그런데 곧 경제 · 사회 등 전문분야에서 특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25년에 시작한 벨기에의 노동청년운동이다. 비오 11세는 이 운동을 가톨릭운동의 모델로 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선임자들의 엄격한 법적인 분류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가톨릭운동이 조직적이거나 비조직적이거나 위임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평신도 활동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가톨릭운동은 노동자들의 협회 프랑스도 청년 가톨릭노동자 활동, 미국은 가두 선교운동을 하였다.

2)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전개

▪설립자가 밝힌 가톨릭운동의 목적

“조선민족은 오랜 역사의 민족, 문화와 도덕을 일찍이 숭상하던 민족, 진리를 찾기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민족, 즉 수만의 순교선조를 가진 민족인 것을 내가 잘 알았다. 위대한 선조의 피가 흐르고 문화와 도덕의 사상이 뼈에 새겨진 여러분은 조선을 참으로 건지고, 참 문화와 참된 행복을 주는 일에 노력하라. 이것이 곧 가톨릭운동이다. 단합과 분발과 인내와 노력을 결하고는 참된 가톨릭운동을 못 할 뿐아니라 이름 있는 민족으로써의 수치이다. 위대한 선조들의 자손이 아니다”.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들이 밝힌 가톨릭운동의 목적

“목 요안 지목구장이 취임 이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업을 전개하는 중에도 가장 자랑스러운 사업은 역시 가톨릭운동이었다. 그는 (…) 당시 일제하에서 피압박 민족으로서 비애와 침체에 빠져든 한국 민족에게 오직 천주께로 향하는 굳은 신앙과 사랑의 승화로써 새로이 희망이 솟고 삶의 뜻을 찾아 민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임을 절감하고 일치단결된 가톨릭운동을 전개하여 이 민족에게 참된 평화와 행복을 안겨 주고자 하였다.”

3) 한국 첫 지역공의회(1931년)와 가톨릭운동

한국교회의 주교회의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1931년 한국 첫 지역 공의회 때 가톨릭운동진흥회를 설치하였고, 1933년 3월 평양지모구장 목 모리스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액션에 관하여’라는 별도의 장을 마련하고, 한국의 전 지역에서 가톨릭액션을 증진하고 통일적으로 적용할 규정을 제공하기 위한 구체적 지침을 제정하였다. 또한 가톨릭 신앙 전파를 위해서 가톨릭출판 사도직을 강조하며 초교구적 차원의 출판 위원회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목 요안 평양 교구장은 곧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을 결성하고, 1933년 범 교구적으로 가톨릭운동을 추진하였다. 한윤식 신부는 대구대목구의 가톨릭 청년들은 매월 자신들이 발행하는 「천주교회보」에 액션의 본질과 필요성을 설명하고, 평신도의 협력을 강조했다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평양교구처럼 가톨릭운동을 조직하여 교구 전체가 즉 지방과 모든 본당에서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 묵상회, 교리 강습, 교리경시대회 등을 꾸준히 열어 이 활동이 교구의 전통이 될 수 있도록 활동한 교구는 다섯 교구 중 평양교구 하나뿐이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목 요안 교구장은 1924-1927년 영유 본당 주임신부 때 이미 평신도 묵상회를 실시하였다. 즉 그는 메리놀 선교사로서 교구장이 되기 전부터 평신도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서울교구에 발간하는 가톨릭청년에 서울교구가 시행한 가톨릭운동에 대한 기사가 전무하고, 대신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에 대해서 기사를 쓴 것을 보면 서울교구는 가톨릭운동에 대해서 활동한 것이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가톨릭청년은 평양교구장 목 요안 몬시뇰이 인구가 별로 없는 숙천지역에 직접 전교사를 파견하고, 주교가 직접 그 지역의 유력한 유지를 직접 입교시킴으로서 숙천지역이 크게 가톨릭신자가 증가하였다는 기사를 썼다.

3. 설립자에 의한 가톨릭운동연맹결성

1)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의 전개

⑴ 첫 전교회장 강습회

목 교구장은 1933년 9월 28일 제1회 평양교구 전교회장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강좌에는 남녀 전교회장 50여명과 청년 지도자 80여명은 서포 교구 본부에 모여 성경, 호교, 교회사, 예전 등에 관한 강습을 받음으로써 폭 넓은 교리지식과 전교활동에 보다 큰 의욕을 갖게 되었다.

이 강습회가 끝나자 전교회장들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강습회가 계속되어 주길 간절히 원하여 즉시 40명의 회원으로 후원회 ‘전도협회’(처음 이름)를 조직하였다. 한편 강습회를 담당했던 김성학 신부와 강사진은 그들의 원의를 통신강의 형식으로 충족시키기로 함으로써 후원회를 모체로 한 ‘가톨릭연구사’가 발족되었고, 1934년 1월호부터 「가톨릭연구강좌」를 간행하게 되었다.

⑵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

목 교구장은 1934년 8월 15일 평양교구 신자 대표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서포 교구청에서 만 4일간 평양 교구 평신도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행한 진지한 토의와 결의사항은 앞으로 전개될 평신도 운동의 지침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논제는 가톨릭운동에 관한 활동 목적과 방법이었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다음과 같다.

2) 가톨릭운동의 조직

▪ 중앙부  • 총재(본교구장)  • 자문회(본 교구의회)

• 의장(홍용호 신부)  • 기관 출판부(가톨릭연구사)  • 위원회(상무위원. 평의위원)

▪ 지부(각 본당)  • 지도 : 본당신부  위원회(상무위원. 평의위원)  ▪ 분부(각 공소)

위원회(상무위원. 평의위원)으로 조직이 되어 있었다.

3) 가톨릭운동의 목적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

⑴ 철저한 신앙심 뿌리내리기와 복음전파

⑵ 문맹퇴치와 가톨릭문화운동

⑶ 교회 단체지도

⑷ 자립 (교무금 적극 납부)

4) 가톨릭대학의 신앙교육 프로그램

- 여러 과목 중에 특별히 성서공부에 힘썼다. 평양교구 평신도 지도자들 뿐 아니라 대구, 청주 등 타 교구의 신자들도 참석하였다.

⑴ 철저한 신앙심 뿌리내리기

1934년 가톨릭대학의 교육 과목은 김성학 신부가 ‘성서강의’라는 주제로 성경공부의 필요성과 효력에 대해서, 또 신구약 총론 중 제1장 성서의 명칭, 권위, 분류에 대해서 상당히 전문적으로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사복음서와 예언서에서 말한 표징,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대한 주석 등 성서공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성서관련 과목으로 ‘성서보전聖書寶典’과 ‘구세주전救世主傳’이 있었다. 구약성서는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모세오경 등 수준 높은 강의가 열렸다.

성서보존은 교리에 대한 참고구절을 밝혀 성서와 교리를 연결도록 안내하고 있다. 호교론, 교회사 강의는 한국교회사를 포함하여 사도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교회사 전체이었고, 예전(전례), 주일학교 교재, 완덕론 등의 강의가 있었다.

▪ 다음 기사는 당시 가톨릭대학의 강좌의 세부사항이다.

“강의는 개강식을 행한 다음 날부터 매일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강좌와 저녁 후 1시간의 담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일주간동안 총 39시간이나 되는 강좌를 마쳤 다”.

“금번에 청강과목은 성서총론과 구약성서 중 난문제難問題 해결에 대해서 대구 신학교 교수 주재용 신부가 13시간을 담임하고, 7성사 총론과 각론 13시간을 전라북도 군산교회 주임 김영구신부가 13시간을 담임하고, 가톨릭사상사 5시간을 본사 주간이 담임하고, 가톨릭교육론 2시간을 장홍룡 신부가 담임하고, 매일 저녁 후 1시간씩 주 신부의 조선순교강담회가 열렸다.” 평신도 강사 중에 김구정 강사가 뛰어났다.

- 여러 과목 중에 성서공부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설립자 목 교구장은 가톨릭대학 강좌에서 한국 교회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의 확고한 정체성과 사명감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가톨릭연구」 1934년 9월호에 ‘치명자 특집’을, 1935년 제2권에 ‘조선 가톨릭창건사’, ‘조선가톨릭 세기世紀半史’ 기념 특집 합집호는 초창기 한국교회의 시작부터 1 전 역사 과정을 다루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조선가톨릭신자들의 정체성을 밝혀 줌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조선민족이 벗어나 희망의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였다.

▪ 설립자의 한국 순교자에 대한 존경과 애정

“내 평소에 조선 청년들을 사랑하였다. 조선 청년들의 얼굴을 볼 때는 조선 청년들의 전형인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를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청년들의 교양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리 강습, 청년지도자 양성, 교리 경시대회 등의 모든 시험을 하였던 것이다. 나 자신이 항상 힘쓴 것은 내가 조선화 하여 조선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선 사람이 좋아하고 갈망하는 사업을 내 힘자라는 데까지 해 보려고 하였다.”

- 조선 천주교 사료전시회 개최

1935년 10월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 행사는 ‘조선 천주교 사료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150년간 조선 천주교가 걸어 온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축소한 것 같았다고 하였다. 이 전시회는 조선 천주교의 참 문화를 통해서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희망의 길로 나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사료 전시회는 도서 참고관과 순교관으로 나누어서 전시되었다. 도서관에는 정하상의 상재상서, 배론 신학교의 개교기념사진, 스페인 사람이 만든 조선지도 등 200점이, 순교관에는 순교자들의 이름과 초상화, 김대건 신부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의복과 십자가, 병인박해 당시 최진태의 옥중유서, 대원군의 척사윤음, 김대건 신부에 대한 사형판결문이 실린 일성록, 황사영 백서의 전문, 시복식 칙서 등의 400여점의 자료가 전시되었다. 이 전람회는 한문서학서를 통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초기 천주교 역사와 더불어 100여 년의 박해역사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전시회는 4일간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특히 역사를 연구하는 학도들과 중등, 전문학교 교수들의 관심이 가장 컸었다.

- 한국 순교자 대축일의 기념행사

“평양교구 천주교회는 치명 복자들의 거룩한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한 기념행사를 거행하였고, 밤 8시부터는 500여 명 신자들이 제등행렬로 복자들의 거룩한 순교를 바탕으로 발전한 천주교를 신앙하며 복자찬가로 평양 밤하늘을 진동시켜 일반 시민들까지 큰 감명을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어서 “해 마다 연례적으로 거행하는 9월의 복자축일 행사에 1932년에는 2,000여 명이 참가한 제등행렬 외에 복자 김대건 신부, 복녀 김 골롬바, 소년 복자 유대철의 행적을 인쇄한 팸플릿 8천매를 시내 가가호호에 배포하였고, 10월 4일에는 청년회 주최로 백선행 기념관에서 가톨릭 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에게까지 큰 감명을 주었다”고 성대하였던 기념행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한국순교자 성극은 평양 관후리 성당 뿐 아니라 각 지방 본당에서도 실시되었다. 제등행렬은 시골 공소까지 행하였다.

- 「가톨릭연구」는 이미 실시한 활동으로 계몽운동, 복음전파운동, 자선사업과 교무금 실시를, 금년 안에 실시한 활동으로 순회 교리강습회, 교회 출판물 보급운동, 문맹퇴치라고 게재함으로서 그간의 활동상황을 알렸다.

- 평양교구는 교리강습, 전도사, 회장, 청년들을 위한 묵상회, 강연 대회, 교리대학 개최, 매해 교리 경시대회 개최 등 다양한 평신도 사도직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평양교구는 신설교구임에도 불구하고 월간지 「가톨릭연구」와 「성등」(聖燈)이라는 시보도 매월 펴냈다. 내용은 국내외 교회 소식, 논설, 취미, 문예 등 각 방면에 걸친 기사가 실렸으며 당시 청년층 신자들의 열성은 대단했다.

⑵ 문서선교의 장場: 「가톨릭연구」

당시 한국교회에는 「경향잡지」와 대구에서 발행하는 「천주교회보」 (가톨릭신문의 전신)」, 서울에서 발행하는 「별」이라는 월간 신문이었고, 1933년 6월 서울에서 「가톨릭청년」이 창간되었다. 최석우 신부는 교회내외의 지성인을 상대로 최초의 고급 교양지로 자처했던 「가톨릭청년」이 「가톨릭조선」의 경쟁에서 이기지 어려워서 1936년 12월 폐간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톨릭조선」은 「가톨릭청년」에 맞먹는 종교지일 뿐만 아니라 수준 높았던 계몽지요, 교양지였고, 따라서 교회 안팎의 지성인을 통해 당시 한국의 문화와 정신면에서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가톨릭조선」은 1930년대 한국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이 잡지가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사의 자료로서의 가치라고 하였다. 동시에 평양교구사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북한교회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서 널리 이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 초기에는 성서해설·호교·교회사·전례·주일학교교리 등이 주였으나, 차츰 문예란·아동란·독자란 등이 증설되었고, 조선순교기념·대구교구설정 26주년기념·간도선교(間島宣敎) 40주년기념 특집 등의 기획기사를 마련하는 등 편집내용과 체제가 다양해졌다.1936년 『가톨릭청년』의 폐간 이후 한국천주교에 단 하나 남은 잡지로서, 193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기까지 민족 항일기에 한국가톨릭의 문화와 학술을 대변하였으며, 오늘날 평양 교구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⑶ 문맹 퇴치 : 당시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의 문맹자는 80%였다

① 산간 공소까지 야간 학원 설립

홍용호 신부는 「가톨릭연구」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가톨릭진리를 선포하는 것 보다 더 신성한 직무가 있으랴? 거룩한 사도들이여, 그대들의 직무를 어떻게 다 하려는가? 문명한 오늘 이 시대는 변천하는 것이니 진리 전파의 방법도 시대에 적응하도록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명한 오늘 시대에 선포는 글(문서)로서야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남는바이다. 따라서 가톨릭전파도 문서전도가 가장 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먼저 읽으라, 그리고 읽도록 하여라. 또한 읽을 것을 만들어라. 이것이 우리의 세 가지 부르짖음이다. (…) 문맹들은 참으로 가련한 자들이다. 배워라! 가톨릭 식자들이여! 가르쳐라!! 이것은 그대들의 가장 신성한 사도직이다. (…) 각 가정에서는 모르는 부모처자를 하루에 몇 시간 혹은 적어도 한 주일에 몇 시간씩을 < ㄱ >자부터 가르치기를 시작하라. 이것은 또한 가정생활의 한 단란일 것이다. 각 교회와 집합에서는 문맹퇴치기관을 설립하가. 각 본당, 각 공소, 각 동리에는 반드시 언문학교부터 먼저 시작하라. 이 것이 우리의 부르짖음이요, 절규이다. 이와 같이 하면 조선의 가톨릭신앙은 확고히 뿌리박을 것이다. 

설립자는 각 본당 신부들의 협조를 받아 본당의 시설들을 이용하여 야간학원을 설립하고 신자 비신자 구별 없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가난한 어린이들과 성인들까지 초등교육을 실시하도록 배려하였다.

② 가톨릭 문화 활동

가톨릭 문화 활동으로 문인회文人會를 조직하여 시회詩會를 열고, 창작과 작품 전람회, 극 연구회 등을 지방마다 개최함으로써 가톨릭문화를 대중화하여 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시 되었던 문화행사가 극운동劇運動 이었다. 이 운동은 어느 문화예술보다도 가장 생활화한 문화운동이었다. 많은 지방 순회공연을 가진 평양관후리 본당 소년군(1923년 조직)의 연극 활동과 순교복자 축일 행사에 순회 순교성극 공연이 성행한 것은 가톨릭운동 속에 극운동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가톨릭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가 확대되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청년층 신자들의 열성이 대단하였다고 했다.

⑷자립정신(교무금 납부)

평양교구내의 가톨릭운동의 활동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교무금 납부였다고 하였다. 가톨릭연맹 회원들의 적극적인 자립정신 권장에 신자들이 부응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였다.

⑸ 자선사업

가톨릭운동은 보육원과 양로원 등의 자선사업도 본당 신부 혹은 부유층 신자들에게 일임하지 않고, 자치적 운영으로 큰 성과를 올렸다.

4. 평양교구의 전교사와 신자 수

평양교구는 적게는 본당에 한 명의 전교사, 많게는 15명의 전교사를 두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여성전교사가 남성 전교사보다 많았다.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사 수는 1928년 89명, 1939년에 103명이었다. 이 숫자는 신자수에 비해 많았다. 반면 대구 교구는 1927년에 24명, 1933년에 52명이었다. 무급 전교사까지 합하여 100명 정도 되었다. “목 교구장 부임 초에 9개 본당과 65개 공소에 총신자 수가 7,202명에불과하였으나 목 교구장이 떠날 때는 모두 19개 본당과 134개 공소에 신자 총수 17,738명 그리고 3,200명의 예비신자가 확보되었다. 그의 아낌없는 노력이 얼마나 위대한 자취를 남겼는지 이로써 알 수 있다.” 신자수 증가율은 조선천주교회 1위, 메리놀회 선교 동북아 지역에서 1위였다.

5. 설립자의 조선민족 사랑

1) 태극기를 제대보 아래 깔고 미사를 봉헌한 설립자

목 몬시뇰이 교토 가와라마찌 중앙 성당에서 한인들을 돌볼 때 목 요안 몬시뇰을 도와서 빈민촌 방문과 미사 복사를 하였던 강원홍(노렌조)은 우리에게 일본에서의 목 요안 몬시뇰의 모습을 전해 준다. 강원홍은 평안도 영유본당 때부터 목 요안 몬시뇰을 잘 알았고, 목 몬시뇰은 평양에 있을 때 노렌조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 집전도 하였다고 한다. 강 노렌조는 『목 요안 신부』, ‘단신으로 한인 80,000명을 보살피는 목자 모리스 신부’라는 제목으로 The Kyoto Bamboo Wireless, Tuesday, May, 30, 1938년 메리놀 신문에 실린 글의 사진에서 목 요안 몬시뇰과 함께 자전거 핸들을 손에 쥐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앞을 향해 서 있는 신자다.

강 노렌조의 손녀딸 강복희 화비아나 수녀는 1934년 1월 1일생으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여 2018년에도 대구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꽃꽂이 등 그 연세에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고 있다. 강 화비아나 수녀를 방문하여 알아 본 사실을 기록한다.

『기억의 돋보기』에 따르면, 일본의 외국인들은 언제나 의심을 받아왔지만 1930년대에는 아예 간첩 취급을 받아야 했다. 일본 군국주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어 영국과 미국에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초등학교 과정에서 외국의 적대세력에 대해 경계하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충성을 바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1935년은 메리놀 회원들이 교토에 계속 머무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한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박숙안 수녀가 1992년 10월 교토 메리놀회를 찾아 갔을 때도 목 요안 몬시뇰이 사목했던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 메리놀 선교사는 당시 미국과 일본의 적대 관계가 심각했고, 목 요안 몬시뇰이 고해성사를 줄 때 일본 감시원이 고해소까지 따라 들어와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감시하였다고 전해 주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심지어 교황청까지 일본을 인정하고 그들 정부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목 요안 몬시뇰이 끝까지 한국인을 사랑했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매일 제대보 아래 태극기를 깔고 미사 때 기도했다는 것은 단순히 메리놀회 사제 한 사람의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고, 미국 선교회 역사, 한국 천주교회사와 한국사 측면에서 고찰해야 될 문제라고 본다. 세계의 역사는 항상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였지만 목 요안 몬시뇰은 ‘힘의 논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서 한국 교회의 순교 역사와 가난하지만 오랜 문화적 전통과 순수한 열정을 지닌 한민족을 사랑하였다.

2)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준 설립자

조화선 마오로 수녀는 “우리 수도회 설립자 목 요안 신부님께 대한 말씀을 처음으로 주의 깊게 들었던 1969년부터 현재까지 제가 깨우침을 받은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목 요안 우리회 설립자 신부님은 ‘낳았으되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공을 이루었으되 거기 머물지 않는다’는 옛 성현의 말씀에 맞는 분이라고 봅니다. 목 신부님의 한 생애가 그분이 삶으로 가르치신 설립자의 정신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영적 유산 중 하나라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설립자 목 요안 모리스 몬시뇰의 신분증과 낡은 지갑>

설립자 목 요안 모리스 몬시뇰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마다 수녀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청하였다. 1972년 본회 설립 40주년에는 다음과 같은 축사를 보내왔다.

“With affectionate regards and daily prayers for your exemplary dedication in fervent service of God and His people, I remain your ‘proud’ founder and grateful prayer-partner.” “하느님과 그 백성들을 위한 모범적인 열렬한 봉사, 애정 어린 관심과 매일의 기도로 나는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설립자이자 고마운 기도의 반려자로 남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목 요안 몬시뇰은 자신의 목표를 “한국 교회의 청정(淸淨)함과 열성이 그리스도교 세계 어느 곳에서나 속담이 되도록 기도하고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6. 설립자의 희망: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무엇보다도 이 수녀원의 근본정신은 교육과 전교사업을 실행하려는데 있다.”

“이 수녀회의 실존은 평양시에서 영원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 확신합니다.”

“이 수녀원의 장래는 가장 리상적이오 현하 조선대중이 요구하는 그대로의

모-단식 수녀원이 될 것을 미리 짐작하는 바이다.

모-단식이라는 말은 수녀원에 대하야는 좀 부적당한 문구인 갓다마는 좌우간

모-단은

모-단일 것이다.”

설립자께서 말씀하신 모던한 수녀회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이 수녀원의 장래는 가장 이상적이요. 현하 조선 대중이 요구하는 그대로의 현대식 수녀원이 될 것을 미리 짐작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2021년 현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1933년 가톨릭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목적을 밝히신 그대로 현시대의 흐름과 아픔을 읽고,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요청되는 바를 찾아서 ‘우리나라를 참으로 건지고, 참 문화와 참된 행복을 주는 일을 찾아서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조선민족은 오랜 역사의 민족, 문화와 도덕을 일찍이 숭상하던 민족, 진리를 찾기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민족, 즉 수만의 순교선조를 가진 민족인 것을 내가 잘 알았다. 위대한 선조의 피가 흐르고 문화와 도덕의 사상이 뼈에 새겨진 여러분은 조선을 참으로 건지고, 참 문화와 참된 행복을 주는 일에 노력하라. 이것이 곧 가톨릭운동이다. 단합과 분발과 인내와 노력을 결하고는 참된 가톨릭운동을 못 할 뿐아니라 이름 있는 민족으로써의 수치이다. 위대한 선조들의 자손이 아니다”. 라고 하신 말씀을 되뇌어 본다.

현시대의 진단의 필요.

설립자 목 요안 모리스 평양지목구장은 당시 ‘시대에 대한 통찰’ 을 가질 것을 촉구하시었고, 단순히 가톨릭 신자만을 의식하지 않고, 가톨릭운동이 목적하는 진리의 대상이 한국민족 전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이것은 그의 말에서 민중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그는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청하는가, 그리고 현재 교회는 어떠한 모습이며 미래는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모두 7개항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가톨릭운동의 참뜻을 깨달아 민중을 위하여 정의와 사랑의 지상주의를 가지기를 요구하였다. (김수태 교수의 글 중에서)

설립자께서 요청하신 ‘시대의 통찰’을 2021년 현시대에 다시 한 번 하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특히 가톨릭신자 뿐 아니라 한국민족 전체(민중)을 염두에 두고, 통찰해서 활동해야 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