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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영유 - 평안남도, 한국, 1927년

... 서포에서 다시 올라가면 어파역이다. 이 역에서 6㎞가량 떨어진  영유읍은 평원군 중심이다. 1927년 평양지목구 설정과 함께 영유성당은 지목구 체제를 갖추는 데 밑거름이 됐다. 영유본당 사제관은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영청학교도 세워져 있어 메리놀외방선교회에서 새로 파견된 사제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익히는 터전이 됐고, 수녀원은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로 쓰였다. ...출처[경의·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을 계기로 본 북한 철도와 성당들]

*** 사진을 누르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 영유 성페트릭 성당
2. 수녀원(화려해보이나 건물 한동 전체는 공업학교로 쓰이며, 다른 한동은 진료소와 교리실로 사용.
              빨간선으로 표시된 길은 언덕에서부터 마을까지 내려가는"우리길")
3. 사제관과 선교 수용소(학교 및 선교대상자들의 주거지. 사진으로는 작게 보이지만 정사각형 단지를 차지함. 사제관은 단층벽돌건물)
4. 경찰서와 시청
5. 분대장 주택
6. 공립학교 단지
7. 여자 공립학교
8. 중앙도로("X" - 우체국. 42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9. 서남쪽으로 향하는 산. 우리 마을과 논이 닿는다.
10. 우리 집 뒤로 위치한 낮은 산자락. 흰색 층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경사로가 높다. 무더위를 피해 해가 떨어지면 산책하는 곳.
11. 중앙도로로 나가는 좁은 길 보통 "찻길"이라 불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황해로 가는 군사도로 같다.
12. 언덕의 아름다운 소나무숲.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 주변에 일본, 한국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 우리끼리 "백만장자들의 거리"라고 부른다.
13. 작은 "스파이 타워" 이웃인 개신교 목사가 사과밭과 농가를 내다볼 수 있는, 여기선 아주 흔하다.
14. 개신교 교회와 선교지. 우리와 바로 반대편에 위치하나 우리 언덕 아래이다.
* 토속사원이 보이지 않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11번 바로 위에 위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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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25년 평남 영유성당. 완공 단계의 성당 정문 앞에 판때기가 죽 늘어서 있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신자와 모리스 신부.


영유는 동북방에 묘향산맥이 있고, 서쪽은 평야와 황해로 면한 농, 수산물의 집산지이다.
1902년 한옥을 구입하여 임시 영유성당을 설립함. 교세확장으로 인해 
1924년 영유 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한 모리스 신부는 3대 주임 박우철 신부가 계획했던 성당 신축 추진. 1924년 7월 착공, 50여명의 청국인 인부를 고용하여 1925년 고딕식 연와조 성당을 신축, 벽돌 조적조, 목조 트러스 구조, 종탑을 갖는 성당을 이듬해 5월 14일 축복식을 갖고, 존 모리스(훗날 제2대 평양지목구장) 신부가 찍은 새 성당 사진은 웅장한 고딕식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유성당 제대

신부님 한분이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

 

 영유본당

► 본당 설립 연도 : 1902년
► 소재지 옛 지명 :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
► 현 지명 : 평남 평원군 평원읍
► 마지막 주임 : 홍도근 신부(1945.10∼1949.12)

경의선 어파역에서 6㎞가량 떨어진 평원군의 중심이 영유읍이다. 1895년 한학자이자 의사인 조상순(노르베르트)이 세례를 받고 입교함으로써 영유 지역 복음화의 밑거름이 됐다. 1897년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마련한 조상순은 숙천 섶가지(薪枝里)본당 오스칼 신부를 청해 봄ㆍ가을로 판공을 하면서 선교에 열심을 보였다. 이에 새로운 입교자들이 늘자 읍내 한복판에 큰 한옥을 마련, 본당 승격에 대비했고 1902년 드디어 본당으로 설립된다. 이어 1924년 7월 성당 신축에 들어가 중국인 인부 50여 명을 동원, 1년 만에 고딕식 벽돌 기와집 성당을 지어 봉헌한다.

1927년 평양지목구 설정과 함께 영유본당은 지목구 체제를 갖추는 데 초석이 됐다. 영유본당 사제관은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영청학교도 세워져 있어 메리놀 외방 선교회에서 새로 파견된 사제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익히는 터전이 됐다. 또한, 1925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면(요한, 1899~1966) 전 총리도 영유본당 부설 학교에서 수업을 맡는 한편 평양지목구 재단 사무를 도우면서 지목구의 꼴을 갖춰나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37년에는 신자 수만 1500여 명에 이르는 큰 공동체로 성장한다.

영유성당 수녀원은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로 쓰였으며, 1926년부터는 7~8명의 수녀가 상주하며 전교하고 보육원과 시약소를 운영하며 빈민 구제 활동에 앞장섰다. 메리놀 수녀회는 여자기예학교를 설립, 무료로 12세부터 19세까지 여학생 50명을 가르쳤다. 교과목은 자수와 교리, 조선어, 일본어, 산수 등으로 학생들이 수놓아 만든 작품 판매 수익금은 모두 학생들에게 돌려주는 등 많은 혜택을 줬다.

 

[사진설명] 번 신부가 찍은 한국인 사제, 영유본당 3대 주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님


[이승구 · 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 평양교구 영유성당


야트막한 언덕 위에 그림같이 예쁜 고딕식 연와조 성당이 우뚝 서 있고, 초가집이 드문드문 보이는 동네는 한가롭다. 꾸불꾸불한 동네 샛길을 따라 오르면 서양식으로 지어진 수녀원이 나온다.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현 평원면) 이화리에 성당이 세워진 건 1925년의 일이다. 경의선 어파역에서 서북부로 6㎞ 가량 떨어진 영유읍내로, 1924년 7월 공사에 들어가 중국인 인부 50여 명을 동원, 1년 만에 공사가 마무리됐다. 낙성식 겸 축복식은 이듬해인 1926년 1월에 개최하려 했으나 그해 1월 말 경성대목구(현 서울대교구) 보좌 드브레(Emile Alerandre Joseph Devred, 유세준) 주교가 선종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승하까지 겹치는 바람에 지연되다가 그해 5월 메리놀외방전교회 총장 월쉬 신부가 내한하면서 축복식을 갖는다.

성 파트리치오를 수호 성인으로 한 영유성당은 성당뿐 아니라 사제관, 영청 학교 등이 두루 갖춰져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파견되면 우리말과 풍습, 문화를 익히는 도량이 됐다. 1925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면(요한, 1899~1966) 전 총리도 영유본당 부설 학교에서 수업을 맡았고, 평양교구 설정과 관련해 재단 사무를 도왔다.

영유성당엔 또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로 썼던 수녀원이 지어져 1926년 일고여덟 명의 회원들이 상주하며 전교활동과 함께 고아원, 시약소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빈민 구제에도 힘썼다. 메리놀수녀회는 특히 영유성당에 당시로서는 평양교구 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여자기예학교를 신설, 12세부터 19세까지 여학생 50명을 모집해 교육했다. 교과목은 자수와 교리, 조선어, 일본어, 산수 등으로, 수업료는 전원 면제됐고 학생들이 수를 놓아 생긴 수익금은 모두 학생들에게 돌려줄 정도로 혜택이 컸다.

1895년 '영유의 사도' 조상순(로베르토)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돼 1902년 본당으로 설정되고 1937년이 되면 신자 수만 1500여 명에 이르는 큰 공동체로 성장한 영유본당은 아름다운 복음화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1945년 공산화 이후 박해 속에서 쇠락하다 1949년 12월 11일 15대 주임 홍도근 신부가 북측 내무서원에 연행돼 수난의 길을 걷게 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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